울산 성장의 시작-국도 7호선 시대(29) 4)울산의 인텔리 (14)설두하

■ 학창시절
울산초 졸업 후 경성고보 진학
경성공업고 화학과 들어갔지만
부친 간청으로 사범학교로 옮겨

■ 교육계 헌신
교과는 물론 전인교육도 모범
교사 생활중 사회활동도 활발
1946년 울산중 초대교장 지내

■ 정치권 입문
대현중 교장 끝으로 교직 물러나
공화당 공천 받아 7대총선 당선
교육정책 비판 소신있는 의정

광복을 전후 해 울산출신 교육자들 중 가장 존경을 받는 사람을 들라면 울산시민들 대부분은 박관수, 최두출과 함께 설두하(薛杜廈)를 손꼽는다.

설씨가 이처럼 교육자로 존경받는 것은 그의 삶이 청빈했고 모범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 국어, 수학, 사회, 자연 등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학문은 물론이고 음악과 체육까지 잘 해 전인교육에서 모범을 보였던 교사였다.

 

▲ 설두하(왼편에서 두 번째)씨가 국회의원이 되기 한 해 전인 1966년 공화당 울산시당 위원장 자격으로 최병한 당시 울산시장(왼편에서 첫 번째), 박영출 울산문화원장(왼편에서 세 번째)과 함께 삼산들의 울산문화원 기공식에서 시삽을 하고 있다. 서진길 전 울산문화원장 제공

요즘 울산시민들이 부르는 ‘울산의 노래’라는 시가(市歌)는 박목월이 작사하고 박시춘이 작곡했다. 그러나 이 노래가 나오기 전 ‘울산시민의 노래’라는 시가가 있었는데 이 노래를 작사한 사람이 설씨다.

‘금수강산 동남을 그 옛날부터/ 굳건하게 지켜온 이 고장이다/일어서라 시민들아 다 일어서라/이제는 우리들이 일할 차례다/이제는 우리들이 일할 차례다’로 되어 있는 이 노래는 울산이 공업도시로 지정된 1962년 만들어졌다.

이 노래는 울산시청이 옥교동에 있었던 초창기 아침 조회 때마다 공무원들이 부르곤 했다. 당시 울산시청에 근무하면서 노래에 재질이 있어 이 노래를 공무원들에게 가르쳤던 서진길 전 울산문화원장은 “이 노래는 곡이 힘들어 노래를 부르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가사 내용만은 요즘 우리들이 알고 있는 ‘울산의 노래’보다 훨씬 애향심이 풍겨나는 노래였다”고 회상한다.

설씨는 청소년 시절에는 운동도 열심히 해 검도가 3단이나 되었다. 그는 나이가 들었어도 검을 놓지 않고 검도를 통해 정신을 무장시키고 체력을 단련했다.

그가 나중에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교육자 생활을 할 때 보인 이런 청빈함과 모범적인 생활 때문이었다.

그는 국회에서도 모범적인 교육자였다. 당시 국회의원들 중 한문을 가장 많이 알았고 특히 <사서삼경>에 달통해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자주 <사서삼경>을 강의하곤 했다.

설두하는 1899년 반구동 서원 마을에서 설령(薛聆)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래로 근하(槿廈), 창하(昌廈), 문하(文廈)가 있었다. 울산초등학교 3회 졸업생이었던 그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중고교)로 진학했다. 그가 당시 국내에서 제일 입학이 힘들었던 이 학교를 간 것을 보면 어릴 때부터 머리가 영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유수씨가 쓴 <울산향토사연구논총>에는 이때 그가 김홍조옹의 경제적 도움으로 경성고보로 갈 수 있었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1900년을 전 후해 김옹은 울산의 젊은이들 중 장래가 유망한 학생들을 상대로 유학을 보내었는데 이 명단에 그가 들어 있다.

이 무렵 김옹은 학생들만 유학을 보낸 것이 아니고 울산여자학교와 일신학교, 개운학교를 세웠는데 1911년에 건립한 울산여자학교에 설씨의 아버지 설령을 교장에 임용해 두 집안이 옛날부터 가까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기록에 대해 설씨의 아들 성제(聲帝, 80)는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성제는 설씨의 동생 창하의 아들인데 나중에 설씨가 아들이 없자 양으로 받아들였다.

성제는 “당시 할아버지가 남의 도움을 받아 아버님을 공부시킬 정도로 가정 경제가 어렵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설령은 당시 하상면장을 지냈을 뿐 아니라 수리조합과 금융조합장을 하는 등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해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설씨의 바로 아래 동생인 근하도 울산에서 초등학교를 졸업 한 후 대구고보로 진학한 것을 보면 설씨 집안이 그렇게 가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김옹과 설령은 반구동에 함께 살면서 평소 아주 친한 사이였다. 성제에 따르면 설령이 반구동에 살 때만 해도 정식으로 한의원 자격증을 갖지는 않았지만 한의에 밝았고 의술이 뛰어나 인근 마을 환자들이 그의 집을 많이 찾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무렵 김옹의 딸이 결핵으로 생사를 헤매고 있었는데 이때 설령이 결핵을 고쳐 주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양가가 친하게 되었는데 이후 서로 왕래를 자주하다 보니 설씨가 진학할 때 김옹으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김옹의 양아들 진석은 다른 의견을 내어 놓고 있다. 진석은 “조선 조 말 인재 양성차원에서 아버지가 장래가 유망하지만 집안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어 공부를 시켰는데도 지금 와서 그 후손들이 아버지 은혜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섭섭한 일”이라고 말한다.

설두하는 경성고보를 졸업한 후 지금의 전문대학 성격인 경성공업고등학교 화학과로 진학했으나 이 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다시 경성고보에서 운영하는 일 년 과정의 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한 후 교사가 되는데 이것은 아버지의 간청 때문으로 풀이된다. 설씨의 아버지는 평소 자녀들이 교육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고 특히 장남인 설씨가 교육자가 될 것을 늘 권면했다. 이러다보니 부친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해 교사가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로 설씨의 동생 근하도 대구고보를 다니는 동안 울산에서 청년운동을 열심히 했고 나중에는 양사초등학교 교장을 지내는 등 교사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설씨는 일제 강점기 교사로 있으면서 사회 활동도 활발히 벌였다. 그가 갓 서른 살인 1929년에는 울산청년회에서 조선울산지국 후원으로 ‘울산부인 개신강연’을 개최했는데 이때 미신타파, 허례허식 폐지, 소비절약, 건강증진을 내용으로 하는 열변을 토해 관중들의 박수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동안 밀양 산내초등학교 등 주로 경남지역에서 교사로 활동했던 그는 해방이 되기 전 농소초등학교로 와 교장으로 있었다. 해방 직후에는 다시 부산 봉래초등학교로 가 교장직에 있었는데 그가 다시 울산으로 온 것은 울산 유지들이 울산중학교를 건립하면서다.

일제 강점기 일본군의 보급창고였던 학교 터에서 건빵이 많이 나와 ‘건빵학교’로 불리었던 울산중학교가 설립된 것은 1946년이다. 이 때 울산의 차용규, 손정수 등 유지들이 학교를 건립하면서 울산 출신의 유능한 교육자를 물색하던 중 찾은 인물이 설두하였다. 그는 초창기 남녀 공학으로 시작한 이 학교를 울산의 명문으로 만들었다.

이후 설씨는 일산동 방어진 중학교와 대현면에 있었던 대현중학교 설립에 참여해 초대 교장을 지냈다. 일산동에 있었던 방어진 중학교는 방어진에 큰 어장을 가졌던 이종산이 세운 학교로 설씨가 설립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초등학교 과정을 가르쳤다.

그는 대현중학교 교장을 끝으로 일단 교직에서 물러났다. 그가 정치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5·16 이후 공화당이 창당되면서다. 이때 울산시 공화당 사무국장으로 일하게 되는데 7대 총선에서는 뜻하지 않게 공화당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정치에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어 선거에 출마는 했지만 선거운동은 모두 당원들이 했다. 이러다 보니 원내 생활에서도 여당이면서 정부의 잘못된 교육정책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등 올 곧은 정치활동을 하는 바람에 당내에서 눈총을 받았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정치인으로도 검소한 생활을 보였던 그는 서울에 머무는 동안에도 초기에는 청진동 해장국 골목의 동원여관에 머물다가 나중에는 전세금 100만원을 주고 용두동으로 이사해 그곳에서 의원생활을 끝마쳤다.

71년 8대 총선 때는 아예 공천에서 탈락되었던 그는 이후 울산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80년 12월 별세했다. 돌아갈 때 그의 유언도 소박해 “울산공동묘지에 친구들이 많이 묻혔으니 죽은 뒤 심심찮게 그곳에 묻어 달라”는 것이었다. 생전에 그는 외동 딸 정숙(貞淑)을 두었는데 이 딸도 공부를 잘해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후 한때 울산제일중학교 교사로 있다가 의사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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