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환의 述而不作(술이부작)
(15) 힘없는 고을의 설움, 언양현의 경우

<비변사등록> 정조 8년(1784) 10월 1일조에 언양현 백성 이덕연 등의 상소가 실려있다. 조선시대 언양현은 오늘의 울산광역시 울주군의 언양읍·상북면·삼남면·삼동면 그리고 두서면 일부이다.

“선조 32년(1599)에 언양현을 혁파하고, 고을의 반은 울산에 속하게 하고 반은 경주에 속하게 했습니다. 광해군 4년(1612)에 울산으로부터 분립해서 다시 언양현이 되었지만, 경주에 속했던 호암 남쪽의 열박 땅은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민호와 전결이 태반이나 감축되었는데도 군액의 총수는 이전과 같으니 고을의 폐막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울산군이 도호부로 승격되면서
언양현의 인구·전결 더해줘
천남리는 울산, 천북리는 경주에

언양현 13년뒤에 복립되면서
천남리는 원상복구 되었지만
천북리는 모두 돌려받지 못해

<여지도서>의 천전석불 설화에
언양현의 과중한 군역부담 소개
석불은 천전리 용화사에 현존

◇ 언양현 폐지와 복립

그리고는 고을의 폐막을 구체적으로 말했다. 언양현에 할당된 군역 의무자는 1780명인데, 이를 감당할 가호는 656호에 불과하여 한 가호가 3, 4명의 군역을 져야한다는 것이다. 가호는 장부상으로는 1100호나 되었으나 약 460호 정도가 군역에서 제외되어 그 부담이 백성들에게 전가되고 있었다.  

 

이렇게 군역에서 빠져나간 여러 사유들을 ‘잡탈(雜頉)’이라 하는데, 이 잡탈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임진왜란 이후의 민호와 전결 감축이었다. 그 연유는 임진왜란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 32년에 조정은 울산 백성들의 고난과 의병 항전을 표창하여 울산군을 울산도호부(이하 울산부)로 승격시켰다. 그런데 당시 울산군의 읍세는 도호부가 되기에는 인구와 전결이 크게 부족했다. 이에 이웃 언양현을 합속하여 인구와 전결을 더해 주었고, 이로써 언양현은 폐현되고 말았다. 이때 기장현도 북 3개면이 울산부에, 다른 5개 면이 동래현에 합속되어 폐현되었음은 살핀 바 있다.

광해군 원년(1609)의 기유식년 울산부호적대장에 따르면 언양현은 울산부의 임내(任內, 속현)가 되어있고, 하나뿐인 천남리(川南里)에 49가호 139명이 기재되어 있다. 천남의 ‘川’은 언양을 관통하는 남천을 말하는데, 이로써 남천 북쪽의 천북리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천북리의 호구가 천남리와 비슷했다고 가정하면, 왜란 직후의 언양은 100여 가호에 인구 300명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피폐했음을 알 수 있다.

언양현을 폐현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여기서 다시 이덕연 등의 말-고을의 반은 울산에 속하게 하고, 반은 경주에 속하게 했다-을 상기하면 폐현 당시 천북리는 경주부에, 천남리는 울산부에 이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유식년 울산부호적대장에 천남리만 실린 것은 1609년 당시 천북리는 경주부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의 후유증이 다소 가신 광해군 4년(1612)에 언양현은 울산부로부터 분리하여 복립되었고, 천남리는 원상복구되었다. 폐현된지 13년만이었다. 그런데 경주부는 언양현이 복립되면 당연히 돌려주어야 할 천북리를 다 돌려주지 않고 저들의 외남면에 소속시켰다. 이것이 바로 이덕연 등의 상소문에 나타난 ‘호암 남쪽 열박 땅’이다.

◇ 천전석불 설화의 유래

‘호암’은 속칭 ‘범바위’라 하는데, 울주군 두서면 선필리의 하선필 마을 산 중턱에 있다. 이 산의 뒤쪽(경주 방면)에서 개천이 발원하여 인보리의 들판을 가로질러 대곡천에 합류한다. 그러므로 호암 이남의 땅은 바로 이 대곡천에 합류하는 개천의 남쪽 지역이다.  

▲ 울주군 상북면 천전리의 용화사에 현존하는 천전석불의 모습.

정조 13년(1789) 기유식년의 <호구총수>에는 언양현의 행정구역·호·인구가 실려있다. 행정구역은 상북·중북·하북·상남·중남·삼동면 등 6개 면과 여기에 소속된 32개 리이다. 가호와 인구는 1224호에 9410명이다. 6개 면에는 각각 5~7개 리가 소속되어 있는데 유달리 중북면에는 3개 리만 소속되어 있다. 이에 따라 중북면은 98호, 692명에 불과하여 1개 면 평균 204호, 1568명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경주에 이속된 ‘호암 남쪽 땅’이 반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울주군 두서면의 차리·구량리·서하리 등 3개 리가 바로 이 땅이다.

이보다 앞서 영조 33~41년(1757~1765)에 편찬한 <여지도서> ‘경주진관언양현’ 항에 천전석불 설화가 실려있다.

“언양현 남쪽 천전리에 석불이 있는데, 이름하여 ‘미륵’이라 했다. 현의 향리가 군역을 질 장정을 뽑을 때 마을 사람들이 ‘미륵’이라는 이름을 불러주어 이로써 모자라는 숫자를 채웠다. ‘미륵’이 실체가 없으니 군포(軍布)를 바칠 장정이 있을 리 없었다. 향리는 이를 천전리 동민에게 공동으로 부과했다. 이들이 억울해서 석불에게 ‘부처님을 장정으로 충당해서 그 피해가 우리에게 미쳤다’고 호소하니 어느날 홀연히 석불 어깨에 백목(白木) 여러 필이 걸려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처님이 영험해서 몰래 동민들을 도왔다’ 했다.”

군포는 장정이 현역복무 대신 납부하는 면포인데, 석불 어깨에 걸렸다는 백목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에 화폐로 통용되었다. 이 설화는 언양현에서 군포를 수취하면서 해당자가 없으면 이웃 사람에게서 거두는 ‘인징’을 자행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인징은 조선후기 삼정의 문란에서 죽은 사람에게서 거두는 백골징포, 친척에게서 거두는 족징과 더불어 군정 문란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이 천전석불은 울주군 상북면 천전리의 용화사에 현존하고 있다.

이 설화는 <여지도서> ‘경주진관언양현’ 항의 초본인 <헌산지>에도 실려있다. 영조조에 언양사림 서석린이 편찬했다. 여기에는 서석린이 지은 한문소설 ‘잡록’이 함께 실려있다.

◇ 빼앗긴 언양 땅, 가중된 군역 부담

‘잡록’은 언양에서 온 거지 아이가 한 여인숙에서 서울에서 온 나그네를 만나 ‘부모가 형만 아끼고 나를 돌보지 않아 거지가 되었다’고 신세타령하는 내용이다. 여기의 아이는 언양, 형은 경주, 부모는 국왕을 비유한 것이다. 이는 경주부가 언양현의 중북면 3개 리를 차지하고서도 국왕의 비호 하에 돌려주지 않아 언양현이 거지처럼 가난하게 되었음을 비유한 것이다. 이 소설은 필자가 ‘잃어버린 언양 땅’이란 제목으로 번역해서 소개한 바 있다.

서석린은 이 소설에 천전석불 설화를 삽화로 실었다. 그는 여기서 설화 소개에 그치지 않고 “오늘에도 언양에 ‘미륵’이라는 이름으로 군적에 오른 자가 백여명이 있지만 다시는 부처님이 군포를 납부해 주는 영험이 없다” 하여 언양현에서 실체가 없는 백여 명의 군포를 수취하는 문란한 군정과 언양 백성의 고통을 고발하고 있다.

서석린이 설화 ‘천전석불’과 소설 ‘잡록’에서 고발한 언양현 백성들의 과다한 군역 부담은 언양현이 복립될 때 호암 남쪽 3개 리를 돌려받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앞에서 본 이덕연 등의 상소는 바로 이를 지적한 것이다. 이들이 말한 ‘언양현의 군역에서 제외된 460호’는 이 3개 리의 가호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복립된 언양현은 본현의 군역은 물론이고 경주부 3개 리의 군역까지 감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조 32년(1832)에 편찬한 <언양현읍지> ‘방면’ 항은 언양현의 6개 면과 여기에 소속된 37개 리를 기록하고 있다. 1개 면에 평균 6개 리 정도가 소속되었는데, 여기서도 중북면에는 반곡리·다개리·직동리 3개 리만 소속되어 있다. 차리·구량리·서하리가 여전히 회복되지 못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1895년 을미개혁으로 울산군과 언양군이 병립했는데, 언양군의 영역은 3개 리가 사라진 옛 언양현 그대로였다. 1906년에 경주 외남면을 울산군에 편입하여 두북면이라 했는데, 이 두북면은 1914년에 동, 서로 나뉘어 두동면과 두서면이 되었다. 위 3개 리는 경주 외남면과 두북면에 소속되었다가 다시 두서면에 소속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이 3개 리는 언양읍이니, 두서면이니 굳이 소속을 따질 이유가 없다. 옛 언양현이 대부분인 서부 6개 읍·면이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오늘의 언양인들은 천전석불 설화를 간직하면서 수탈이나 다름없는 군정 하에서도 꿋꿋이 향토를 지켜오신 선조들을 기리며 향토애를 가꾸어야 할 것이다. 글= 송수환 울산대 연구교수

그림= 최종국 한국미술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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