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박두복과 ‘오좌불 간첩사건’

▲ 1960년대 중반 간첩사건이 일어났던 오좌불 해변. 오좌불 해변은 당시만 해도 현대중공업이 들어서지 않아 마을사람들이 모래를 퍼가곤 했다. 바다 건너 멀리 보이는 산이 일산유원지다. 장세동 동구문화원 지역사연구소장 제공

1960년대 중반 울산 동구에서 발생한 ‘오좌불 간첩사건’은 당시 국내 최대 간첩사건으로 일산진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밀양박씨 문중을 몰락시켰고 어린 시절부터 보성학교에 함께 다니면서 ‘적호소년회’ 회원으로 일제에 항거했던 박두복과 천경록의 우정을 파괴했지만 지금은 이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박두복과 천경록은 1914년 일산진과 화정리에서 각각 태어났으나 보성학교 입학은 박두복이 1927년인데 반해 천경록은 이보다 두 해가 늦은 1929년으로 되어 있다.

보성학교 동문이자 적호소년회였던
박두복은 졸업후 항일운동 나섰고
천경록은 일본경찰 앞잡이로 활동

박두복이 오좌불 해안에 들어왔을때
믿었던 천씨의 신고로 다시 북한행
이 사건으로 동생 두진은 자살하고
밀양박씨들 사회활동에 제약 겪어

둘은 보성에 입학하기 전 1926년 동면(현 동구)에서 만들어진 ‘적호소년회’ 회원으로 활동해 서로 친했다. ‘적호소년회’는 외부적으로는 문맹 퇴치와 민중의식 고양이 목적이었지만 이들을 지도했던 인물들이 모두 민족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항일정신이 강한 소년단체였다. 실제로 ‘적호소년회’ 어린이들은 일제강점기 일인들이 일산진 약수터에 휴게소를 짓자 밤에 몰래가 이 휴게소를 부수어 버리기도 했다.

박두복과 천경록이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은 보성학교를 졸업하면서다. 박두복은 보성 졸업 후 항일운동의 길을 걸었다. 박씨는 1930년대 초반부터 경남적색교원노조로 활동하면서 여러 번 구속과 출옥을 반복했다. 적색교원노조는 일제강점기 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학생들과 노동계에 침투해 일제의 조선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고 항일정신을 고취시켰다. 박두복은 1933년 비밀결사 교원노동조합을 결성한 후 체포되어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중생활을 했다. 재판기록에는 이때 박두복이 22살로 울산군 동면 일산리에 살았고 무직으로 되어 있다.

이후 그는 부산에 머무는 동안 한국인들을 못살게 구는 일본 헌병을 살해한 후 만주로 도망갔으나 만주에서 검거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그의 삼촌 박학규씨가 울산의 문중 논을 팔아 만주로 가 왜병에게 많은 돈을 주고 그를 살려낸 후 일산동으로 데리고 왔다. 박학규씨는 동경제대 출신으로 초대 방어진 읍장을 지냈다. 박두복이 결혼을 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가 일산동 집에 있을 때 마침 서울 동덕여고를 졸업한 후 보성학교 교사로 왔던 이효정을 박학규씨가 중매를 해 둘이 결혼하게 되었다.

해방은 그동안 항일운동을 해 왔던 박두복의 생활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해방과 함께 그는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이 되어 일본인들이 남겨놓고 간 재산관리인이 되었다. 그런데 그는 얼마있지 않아 이 일을 이석하씨에게 맡기고 서울로 가 남로당 일을 보게 된다. 이씨는 당시 울산군청에서 서기로 일했는데 5·16후 처남 손영길 장군 덕택으로 울산읍장을 지냈다.

박씨는 서울에서 남로당 일을 하던 중 6·25가 일어날 무렵에는 미군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1950년 4월 2일자 동아일보는 그의 행적과 관련 ‘김상룡 비서체포’라는 제목 아래 서울시경찰국이 공산당 조직책을 일망타진한 내용의 글을 싣고 있는데 이 속에 박두복이 시당 조직책으로 체포되었다는 기사가 있어 6·25때 월북한 것으로 판단된다.

박두복과는 달리 천경록이 보성학교 졸업 후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일산동 사람들은 “보성학교 졸업자들이 대부분 애국활동을 한데 반해 천씨의 경우 일본 경찰의 앞잡이가 되었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라면서 “천씨는 보성 졸업 후 일본 경찰의 정보원이 되어 동구 주민들을 많이 괴롭혔다”고 말한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지역마다 한국인 정보원을 두고 이들을 통해 얻은 정보로 조선인들을 체포·구금하고 심지어 고문을 하는 등 악질적인 행동을 많이 했다.

일제강점기 일본 경찰이 머문 방어진 주재소는 한국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실제로 1935년 6월 14일 동아일보는 ‘울산적색사건’과 관련해 ‘김영활이 사망했고 박학규외 3명이 방어진 주재소에서 조사를 받은 후 울산경찰서로 이송되었다’는 기사를 싣고 있다. 또 ‘방어진 메이데이 사건으로 20여명이 검거되어 방어진 주재소에서 취조 중에 있다’는 기사도 볼 수 있다.

박두복과 천경록의 악연은 ‘오좌불 간첩사건’에서 생겨났다. ‘오좌불 간첩사건’은 6·25때 북으로 갔던 박두복이 오좌불 해안으로 침투하다가 경찰의 추적을 받고 다시 북으로 도망간 사건을 말한다. 오좌불 해안은 70년대 초 현대중공업이 이 자리에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당시 정부 발표에 따르면 박두복이 간첩으로 오좌불 해변으로 들어온 후 천경록이 경영했던 과수원으로 가 천씨에게 동생 두진을 불러줄 것을 요청했는데 이때 천씨가 두진을 데리고 오겠다는 약속을 해 놓고 방어진 지서로 가 두복이 나타났다고 신고하는 바람에 동구 전체에 비상이 걸렸고 이를 눈치를 챈 두복이 다시 북으로 도망 간 사건을 말한다. 이때 경찰이 두진을 연행하려고 하자 두진은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일산진 해변 일대에는 철조망이 쳐지고 오랫동안 해병대가 경비를 썼다. 아울러 일산진에 살았던 박두복씨 가족과 친인척들은 말할 것도 없고 박씨 문중인 밀양박씨들까지도 사회활동에서 많은 제한을 받았다. 당시 박씨 집안에서 천씨를 얼마나 미워했나 하는 것은 박두복의 아들 진수(77·인천시 거주)씨 회상에서 알 수 있다. “오좌불사건이 있은 얼마 후 할아버지 박학문이 돌아갔을 때 천경록씨가 문상을 온 적이 있는데 이때 집안 사람들이 천씨를 쫓아내었다”고 회상한다.

일제강점기 박두복과 그의 가족들이 이처럼 어렵게 살았던데 반해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천경록은 해방 후 1대와 2대 두 번이나 방어진 읍의원을 지내는 등 지역 유지로 행세했다. 그는 해방 후 우익으로 활동하면서 일산진에서 한의원을 경영하면서 자유당 독재정권에 항거했던 홍모씨를 괴롭히는 등 나쁜 짓을 많이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천씨가 일산을 떠난 것은 70년대 일어난 강도사건 때문이었다.

현대중공업이 들어서면서 공장 주위에 농토가 많아 부자가 되었던 천씨 집에 일산 출신의 안모씨가 복면을 하고 밤에 총을 들고 들어 간 것이 70년대 중반이었다. 그런데 집안으로 들어선 안모씨가 총을 들고 주춤하는 사이 유단자인 천씨가 안모씨를 가격해 안씨의 복면이 벗겨지는 바람에 안모씨의 정체가 탄로가 나고 말았다. 그러자 안모씨는 천씨에게 “내가 경찰에 잡혀가도 10년 이상 형을 살지 않을 터인데 당신이 나를 신고하면 출옥 후 보복을 하겠다”고 겁을 주었다. 그러나 다음날 천씨가 안모씨를 지서에 신고해 안모씨가 체포되었다.

이후 천씨가 겁을 먹었기 때문인지 얼마 되지 않아 일산동을 떠났는데 지금까지 소문이 없다. 동구 사람들 중에는 아직 ‘오좌불 간첩사건’을 많이 기억하지만 지금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입을 열려고 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인 밀양 박씨들조차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아직 입을 열 때가 아니다”면서 함구한다. 이 사건으로 당시 경찰서에 불려가 조사를 여러 번 받았던 박두복의 아들 진수씨도 “당시 우리나라 해안의 경계태세를 보면 북한에 계신 아버지가 쉽게 울산에 와 오좌불을 통과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면서 “그 사건과 관련 조사는 많이 받았지만 조사과정에서 아버지를 본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에 실제로 그때 아버지가 울산으로 남파되었는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사건의 내용도 경찰만 알고 있어 지금 생각해도 ‘오좌불간첩 사건’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해방 후 그동안 사상 문제로 음지에서 고생해 왔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과거사 진상조사위원회’가 만들어지는 등 정부 차원에서 화해의 손길을 내 밀었지만 아직 피해자들 사이에는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실제로 박두복 부인 이효정 할머니만 해도 울산 출신의 이순금과 함께 동덕여고 시절 항일운동을 치열하게 벌였지만 남편 두복의 간첩사건으로 지난 50여 년 동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다가 2006년 8월 15일에야 독립유공자로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 훈장을 오랫동안 가슴에 달지 못하고 훈장을 받은 얼마 뒤 눈을 감고 말았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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