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의 화첩으로 알려진 <교남명승첩>에서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반구대 일대를 그린 그림 한점이 더 발견됐다. 영남의 34개 지역 58개 명소를 그린 <교남명승첩>의 1권 23면에 ‘언양 반구대’라는 화제(畵題)가 적힌 그림이 있다고 반구대포럼이 밝혔다. 지난 2008년 ‘반구’라 적힌 그림 한점이 알려진 것에 이어 반구대 실경을 담은 두번째 그림이다. 반구대가 명승지였음을 증명해주는 자료로서 그 가치가 크다.

지난번에 발견된 ‘반구’는 깎아지른 듯 솟아 오른 절벽이 묘사돼 있었던 것에 비해 이번 ‘언양 반구대’는 산과 계곡, 그 아래 마을이 두루 담긴 진경산수다. 반구대로 보이는 높고 평평한 바위 위에는 사람도 두세명 앉아 있다. 절경을 감상하러 나온 시인묵객과 그림을 그린 이로 짐작된다. 간송미술관이 보관하고 있는 <교남명승첩>은 겸재(1676~1759년)의 그림이 아니라 그의 손자 정황(1739~1800년)의 그림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느 주장이 사실이든 그림으로 옮겨담고 싶을만큼 풍광이 빼어났던 것만은 틀림없다. 포은 정몽주, 회재 이언적, 한강 정구 선생 등이 자주 찾았고 명시를 남긴 것만으로도 반구대가 조선시대 울산지역의 대표적 절경이었음은 분명하다.

이 그림에서 보면 반구대(盤龜臺)는 이름 그대로 높고 평평해서 주변의 좋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대(臺)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하고 있다. 거북(龜)이 걸어나오는 형상을 엿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으나 바위 위쪽이 쟁반(盤)처럼 널찍해서 이름값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조선시대 선비들이 시와 그림으로 절창했던 흔적이 남아 있는 반구대가 오늘날에 와서 국보 285호인 암각화에 묻혀 그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반구대 아래쪽 계곡 바위벽면에서 1971년 발견된 암각화의 명칭을 ‘반구대 암각화’라고 붙이면서 반구대는 곧 암각화로 인식돼버린 것이다. 사실상 반구대가 이때부터 제 이름을 암각화에 줘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면서 반구대와 관련된 역사유적도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고 있다.

잇달아 발견된 겸재의 그림을 통해 반구대의 가치를 다시 세울 필요가 있다. 겸재의 그림과 같은 풍경이 보이는 지점을 찾아 겸재의 그림을 묘사해 세워놓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관광자원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대곡천의 문화유산을 더 풍성하게 할 수 있다.

‘반구대 암각화’도 공연히 반구대라는 남의 이름을 빌려 쓸 것이 아니라 천전리각석(국보 147호)과 더불어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지어진 ‘대곡천 암각화’ 또는 ‘대곡천 바위그림’으로 그 이름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공자도 ‘이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면 일을 이루지 못한다’며 정명(正名)을 중시하지 않았던가. 늦었지만 잘못된 건 바로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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