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입맛에 맞춘 정치적 공무원
법령 무시한 부당한 지시 등 문제
상관 지시라도 불법은 절대 안돼

▲ 이기원 전 울산시 기획관리실장

며칠 전 사석에서 ‘적폐 청산’에 대한 대화 중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는 말이 또 나왔다. 몇몇이 공감하는 분위기였으며 특히 간부 공무원으로 퇴직한 자도 “그래, 공무원은 시키는 대로 해야 해”라며 맞장구를 쳤다. 과연 공무원은 영혼이 없는 인간일까? 차제에 공직사회에 대한 국민들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퇴직 공무원으로서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은 막스 베버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과 전문성을 강조하면서 “관료는 개인 감정을 갖지 않으며, 이상적인 관료는 영혼이 없다”고 한데서 유래되었고, 2008년 국정홍보처 간부가 “우리는 영혼이 없는 공무원들이다”고 한 이후 최근에는 전 대통령 탄핵 관련 조사 과정에서도 대두되었다. 살펴보면 19C는 국가의 역할을 최소화함으로써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할려는 소위 ‘야경국가’였고, 20C 이후 현대사회는 적극적인 행정작용이 필요한 ‘복지국가’를 추구했다. 법규에만 매달려 있어서는 안되고, 지역과 국가의 미래를 위한 청사진을 마련하고 국민의 복지를 증진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들을 끊임없이 개발해 시행해야만 국제사회에서 존속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보다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고와 행동이 필요하며, 대다수의 공무원은 그런 영혼을 가지고 행정을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이러한 말이 나올 수 있는 일들이 생길까?

그 이유는 바로 공무원 제도와 정치(적) 공무원들 때문이다. 우리 공무원법은 복종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소속 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해야 할 의무를 지니며 따르지 않을 시 징계의 사유가 된다. 다만 불법한 명령은 제외된다는게 통설이고 판례이나 부당한 명령에는 복종해야 한다. 각종 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는 주로 당·부당의 문제가 대두되는 바 부당한 명령이라고 판단돼도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3권분립의 원칙상 법을 집행하는 ‘행정’을 담당하는 공무원이 법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의무인 것이다. 문제는 정치(적) 공무원들이다. 국가나 지역의 미래보다는 당리당략이나 자기치적을 위한 정책을 지시하고, 또 그 지시를 무비판적으로 정권의 입맛에 맞게 실무진에 지시하는 관리층에 문제가 있다. 몇년 전 울산에서도 모 기초단체장이 법령을 무시하고 공무원에게 지시·시행해 해당 공무원이 큰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한편 부당한 상관의 지시에 당당히 대처하는 경우도 많다. 1990년대 행정계층 축소의 일환으로 읍·면·동 폐지 추진 시 당시 행정자치부의 정치인 출신 장관과 일부 공무원은 직업공무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청와대의 지시에 따라 적극 밀어붙였다. 알다시피 읍·면·동은 행정기관과 국민의 접점으로서 민원은 물론 복지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인간의 말초신경과도 같은 조직이다. 그러나 당시 아마추어 행정가들이 소위 ‘실험행정’을 하면서 정치적 부담이 제일 작은 길을 택한 것이다. 다행히 후임 장관으로 행정을 잘 아는 인사가 취임한 후 실무진의 의견을 받아들여 절충안으로 읍·면·동의 기능 중 일부를 시·군·구로 이양하고 읍·면·동에는 자치센터를 설치하게 된 것이다. 예를 한 가지 더 들면 구 내무부 시절 지방세법에 세금을 면제 또는 감액시켜 주는 조항이 있었는데, 이익단체와 정치인들의 압력으로 감면단체를 추가하라는 법 개정 지시가 있었을 때 당시 담당 사무관은 “저의 공무원 직을 걸고 안됩니다”라며 반대한 일화는 후배 공무원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결코 공무원이 영혼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기회를 빌려 후배 공무원들에게도 당부할 것이 있다. 우선 아무리 상관의 지시라도 불법한 명령은 절대 따르지 말아야 하며, 부당하다고 판단되는 경우는 대화를 통해 최대한 설득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본인의 판단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 또 인·허가 등 민원부서의 경우 많이 개선은 되었으나 아직 권위적이고 소극적이라는 비판이 있기 때문에 보다 전향적인 자세와 신속·공정 등 민원처리의 기본을 지킴으로써 국민의 신뢰를 더욱 높여 나가야 할 것이다.

이기원 전 울산시 기획관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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