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곡박물관‘역주 보인계시첩’

1932년 결성돼 45년간 유지

울산 ‘보인계’ 시문집 번역

▲ 역주보인계시첩
근현대 과정의 울산 ‘계중문화’ 일면을 보여주는 학술자료집이 나왔다. 울산대곡박물관이 펴낸 <역주 보인계시첩>(譯註 輔仁契詩帖)이다.

우리 고유 계(契) 문화는 시대와 환경이 바뀐 오늘날에도 생활 깊숙이 뿌리박혀 있다. 상호부조·공동이익을 도모하던 계 조직은 유독 울산에서 ‘계중’이라는 말로 이어져 올 만큼 울산의 독특한 도시성향으로 자리잡았다.

‘세 사람만 모이면 계중부터 만든다’는 울산의 계중문화는 급속한 근대화와 산업화의 산물이라는 해석도 있다. 팔도에서 모인 주민들이 서로의 이익을 챙겨주고 교분을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시대의 흐름 따라 모임의 성격은 협동과 친목에서 세대간 교류, 동시대 통합, 해외여행, 재산공유, 같은 직장, 취미 공유 등으로 셀 수 없을만큼 분화되고 있다.

<역주 보인계시첩>은 1932년 결성돼 1976년까지 45년 동안 유지된 울산 ‘보인계’(輔人契)의 시문집(국역)이다. 과소비와 낭비로 부작용을 낳고있는 울산의 일부 계중 문화에 경종을 울려 줘 더욱 눈길을 끈다.

보인계원들은 20명의 울산 문사(文士)들. ‘보인’(輔仁)이란 이름은 ‘학문으로 친구를 사귀고, 친구로서 인덕을 높인다(以文會友, 以友輔仁)’는 논어에서 가져왔다. 학성이씨, 울산박씨, 청송심씨, 문화류씨, 밀양박씨, 경주김씨, 고령김씨, 광주안씨 등 계원들은 매년 봄가을에 계원의 집이나 정자를 돌며 시를 지어 시축(두루마리)으로 남겼다. 하지만 이들의 주목적은 시회(詩會)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피폐해진 미풍양식을 바로 잡아 정신을 되찾고 인류도덕을 지키자는 염원에서 비롯됐다.

초창기 한시는 그 같은 시대의식이 가장 강하게 드러난다. 당대를 말세로 인식하면서 외세에 의지한 역사를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봤다. 1960년대 이후에는 타계하는 계원이 생기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노래하는 작품도 생겨났다.

‘우리들 때를 만나지 못해 말세에 처했으니 어떻게 닦고 지켜야 그 중(中)을 얻을까’(1940년, 박문호) ‘둘로 나뉜 강토는 조개와 황새의 형세이고 태반의 인민은 땔나무와 먹을 것을 근심하네’(1947년, 류흥호)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는지 이밤을 맞아 심정은 배로 미칠 듯하네’(1951년, 이운락) ‘우리네 모이고 흩어짐은 날아가는 기러기와 같으니 저 세상에 오르고 내림은 갈매기에 맡겨두네’(1970년 이희락)

이들의 모임은 마침내 1976년 여름을 끝으로 해체됐다. 다만 1980년에 계원의 후손 18명이 또다시 ‘보인계 승계회’를 결성, 선대에 그랬던 것처럼 각 가정을 돌면서 계회를 이어갔다. 이런 과정에서 승계회원들은 여러 집안에 흩어져 보관돼 온 문사들의 한시를 발견, 1998년 <보인계시첩>으로 묶어냈다. 수록된 한시는 모두 282수. 보인계원 17명과 계원이 아닌 41명을 포함해 총 58명이 쓴 한시였다. 보인계 모임에는 계원 아닌 사람도 자주 초대돼 함께 교유했던 것이다.

<역주 보인계시첩> 발간은 어려운 시대를 산 옛 울산 문사들의 한시를 우리말로 번역해 품격 있는 계중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새로운 시대를 기다렸던 마음을 누구라도 공유하도록 돕자는 취지였다. 출간 작업은 신형석 울산대곡박물관장 총괄 아래 엄형섭 울산문헌연구소장이 번역을 맡았다. 관련자료는 ‘보인계 승계회’ 회원이었던 박종해 전 울산예총회장의 도움으로 모아졌다.

홍영진기자 thinpizza@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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