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에 대한 범죄 심심찮게 발생
아이를 부모의 재산으로 여기는
야만적 문화의 흔적 아닌지 걱정

▲ 김상곤 전 울산시감사관

인류가 집단생활을 시작하면서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기본으로 삼은 것이 가족이다. 가족을 통해서 종족 보존에 필요한 후손을 안정적으로 생산·양육하는 질서를 갖추었고, 남성과 여성, 세대와 세대 간의 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문화를 만들었다. 국가라는 근대적 정치체제가 성립한 후에도 가족은 개인과 더불어 정치 경제적 질서를 유지하는 기본단위가 되어왔다. 그래서 우리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를 여러 분야에서 강화하고 있다.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마지막 보루인 형법도 가족의 가치를 침해하는 범죄를 가중 처벌한다. 일반적인 살인이나 상해에 비해서 존속살인이나 존속상해를 가중처벌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학대, 체포, 협박, 감금 등의 범죄에 있어서도 그 대상이 존속일 때는 가중처벌하고 있다.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기본 틀인 효(孝)라는 윤리를 법적 조문으로 구체화한 것이다. 그만큼 중요한 윤리이기도 하지만 침해당할 가능성도 많은 가치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비속 즉 자녀에 대한 범죄에 대해서는 규정하고 있는 분야가 많지 않다. 오히려 영아살해의 경우에는 정황에 따라 형벌을 완화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비속에 대한 범죄가 존속에 대한 범죄에 비해 죄질이 가볍다거나 사회질서를 침해하는 정도가 가볍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자식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는 발생 가능성이 낮다고 본 것이다. 또 이런 영역은 법적인 제재보다는 인간본능에 의존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확실하기 때문이다.

약육강식의 동물세계에서 조차도 자식을 보호하는 것은 가장 강력한 본능이다. 더구나 자식을 스스로 해칠 가능성은 동물유전자의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는 것 같다. 물론 어류와 같은 하등 동물 중에는 자손을 전혀 돌보지 않는 것들도 있다. 대신 엄청난 수의 알을 낳아 생존 개체수를 늘린다. 새끼에게 조금이나마 신경을 쓸 수 있는 물고기는 알의 수를 줄인다고 한다. 새끼를 보호할 가능성이 좀더 높은 새는 알의 수를 10개 정도로 줄인다.

인간은 보통 일 년에 1명밖에 낳지 못한다. 그래도 부모의 지극한 보호본능 덕분에 종을 유지하면서 지구를 지배하고 있다. 성숙한 개체로 자랄 확률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최근 우리사회에서는 동물세계에서도 흔하지 않고, 문명화 이전의 원시사회에서도 그 흔적을 발견하기 어려운 범죄가 늘어가고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이유없이 폭력을 가하거나 살해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다. 듣기 민망하거나 불편하여 외면해 버리기에는 너무 자주 일어나는 일인 것 같아 인간의 정체성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특히 어린 자녀를 자신의 사소한 심리적 사유로 살해하는 경우를 보면 인간에 대한 우리의 오랜 믿음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어린 아이에 대한 범죄는 원시시대의 경우에도 전쟁이라는 최후의 생존싸움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극히 드문 현상이었다. 자기 가족이나 종족의 생존을 위한 경우에 발생하는 최후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어린이에 대한 폭력은 여기에 비하면 그 원인이 너무 가볍고 즉흥적이어서 그 사유에 대한 변명을 발견하기 어렵다. 인간의 탐욕과 폭력성, 잔인성은 법률이나 교육, 윤리, 종교로도 그 뿌리를 제거할 수 없는 것인가? 문명과 문화라는 인간의 창조물로는 가릴 수 없는 패륜적인 요소가 우리의 본능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 두렵기도 하다. 혹시 바라는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이라고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자기의 감정이나 욕망을 이 세상에서 추구해야 할 가장 확실하고 강한 목적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추구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그 무엇이라도 가차 없이 버리려 하는 것은 아닌지. 아이들을 부모가 처분할 자유를 가지고 있는 재산으로 보는 야만적인 문화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우리는 인간의 중요한 본성을 인의예지로 흔히 표현한다. 그 중에서도 인(仁)은 인간 본성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측은지심으로 구체화된다고 알려져 있다. 이웃의 어린아이가 물가로 기어가는 것을 보면 누구나 놀라서 뛰어가게 된다. 이것이 측은지심이다. 세상이 변해 이러한 윤리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심성이 새로 발현된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김상곤 전 울산시감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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