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울산의 봄, 서생포왜성 벚꽃천지

▲ 2018년 4월 서생포왜성, 83X49cm, 한지에 수묵담채.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은 벚꽃에 취해
술잔대신 스마트 폰을 손에 쥐고
꽃과 눈 맞추기에 바쁘다.
손녀의 손을 잡고 올라온 칠순의 할머니는
성벽에 기대어 앉아 꽃을 보며 말을 잃고,
꽃비를 맞는다.
그야말로 꽃에 취했거나 넋이 나간 사람들이다.

울산을 담은 풍경화를 그리기로 했다. 한국화를 선택한 건 여백의 크기만큼 우리 생활에 한 줌 여유를 풀어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까이 있어 오히려 외면했던 그림 속 그 곳으로 들어가 보자. 시인의 에세이가 사유의 공간으로 인도한다. 잊었거나 혹은 몰랐던, 옛 시간의 흔적과 삶의 가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울산의 봄은 바다에서 온다. 겨울이 녹은 자리에서 바다가 눈을 뜬다. 봄은 햇살을 받아먹고 몸을 데워 훈풍을 불어댄다. 그러면 바다가 일어나서 봄을 맞아 꿈틀댄다. 하늘이 맑은 날 바다는 회색빛에서 청동빛으로, 다시 푸른빛으로 변한다. 흐린 날은 은회색 빛으로 바뀐다. 그렇지만 바다의 봄빛은 따듯하게 출렁인다.

울산의 봄은 바다에서 생동한다. 봄 바다는 돌고래 떼와 놀다가 멸치와 학꽁치 떼, 가자미, 숭어 등의 물고기 떼를 데리고 와 우리 사는 땅에 갯내음을 풀어놓는다. 그것들은 소금 향기, 생명의 비린 노래. 바다에 태어나 물길을 헤치며 나아가는 지느러미의 파동, 조그마한 떼 물결. 소금꽃 피어나는 울산의 봄, 있어 우리는 생의 시력을 회복한다. 그렇게 봄은 겨울을 견디고 나와 삶을 다독인다.

▲ 서생포 왜성 전경.

봄날, 나는 바다로 간다. 서생 바다로 간다. 바다를 바라보며 꽃을 피웠다 바람 맞아 떨어지는 서생포 왜성 벚꽃, 보러 간다. 31번 국도를 타고 온양읍 남창을 지나 진하로 가는 길은 울렁거리고 휘돌아간다. 울렁거림이 꽃 보러간다는 설렘이라면 휘돌아가는 것은 꽃 피운 마음을 읽는 것이다. 그러니까 꽃을 보러 가는 날은 봄이 아니고 ‘봄날’이며, 꽃을 보러 가는 길은 그냥 길이 아니고 ‘꽃길’이라고 중얼거린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 듯 연두색 초록빛 나뭇잎들이 길을 따라 손을 흔들고 손뼉을 친다. 진하 바다가 보이고 자동차는 천천히 서생포 마을길을 지나 주차장에 도착한다.

서생포 왜성 동쪽 가파른 언덕길을 천천히 오른다. 초록 풀들이 돋아난 언덕에 과수원 배꽃이 철사 그물망을 뚫고 올라온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벚나무 한 그루가 꽃을 날린다. 그 벚나무는 서생포 왜성 꽃길 안내 도우미다. 나무가 가리킨 오르막길이 경사지고 꼬부라지면서 갈 지(之)를 써 놓았다.

산모퉁이에는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는 서생포 왜성 안내판이 있다. 왜성은 일본장수 가토 기요마사가 선조 26년(1593년) 쌓은 16세기 말의 일본식 평산성이며, 선조 27년(1594년) 사명대사가 4차례 걸쳐 이곳에 와서 가토 기요마사와 평화교섭을 하여 많은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선조 31년(1598년)에 명나라 마귀 장군의 도움으로 성을 다시 빼앗았다는 등의 내용이 적혔다. 그런데 문장이 어색하고 역사적 사실(史實)을 모호하게(왜군을 물리쳤는지, 왜군이 물러갔는지) 설명해 놓았다. 산 중턱에는 벚나무들이 성벽 주변에 둘러앉아 바다를 바라보면서 꽃, 꽃을 날린다. 나는 벚나무들 곁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회야강이 바다로 흘러들다가 강구에 이르러 건물 뒤로 숨어버린다. 소나무와 벚꽃 사이사이로 보이는 바다는 검푸른 빛으로 빛난다. 멀리 지평선은 희뿌연 아지랑이를 피워낸다. 진하해수욕장 해변 섬, 명선도의 소나무들이 서생포 왜성 벚꽃을 우러른다. 바다를 보며 나는 꽃을 보러 왔고, 공중에서 빛나는 생을 꿈꾸다 지는 절정을 만나러 왔다고 말한다.

서생포 왜성 정상 널찍한 성안 마당에 들어선다. 벚나무들이 사방 성벽과 담에서 축포를 터뜨리듯 꽃을 쏘아 올린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 꽃, 꽃비가 날려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눈앞이 캄캄해서 시력을 잃을 뻔했다. 벚꽃은 피면서 떨어지고 떨어지면서 핀다.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처녀애들은 벚꽃에 까르르 웃음소리를 실어 나른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은 벚꽃에 취해 술잔대신 스마트 폰을 손에 쥐고 꽃과 눈 맞추기에 바쁘다. 손녀의 손을 잡고 올라온 칠순의 할머니는 성벽에 기대어 앉아 꽃을 보며 말을 잃고, 꽃비를 맞는다. 그야말로 꽃에 취했거나 넋이 나간 사람들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인이 성을 쌓고 전쟁을 벌이다 물러간 자리에, 벚꽃은 다시 피었다, 날다, 떨어진다. 왜성의 벚꽃은 역사의 흔적을 덮고 허무를 지운다. 역사는 과거이며, 꽃 피는 시간은 순간이다. 꽃 피는 시간이 순간이라면, 꽃 지는 시간도 순간이다. 세월은 가고 순간이 온다. 순간순간이 삶이다. 순간은 영원하다.

그래, 순간의 시간아. 우리의 삶을 해코지하지 않는 봄날아. 우리도 서생포 왜성 벚꽃처럼 피었다 지는, 흘러가고 사라지는 생을 사랑한다고 너에게 고백한다.

봄이 온다, 봄날이 간다.

▲ 그림-최종국 한국화작가

그림-최종국
한국화작가
대한민국한국화우수작가전 등
울산미협 올해의 작가상
경남·울산·제주·대구미술대전 심사
전 울산미협 수석부회장
현 한국미협 이사

 

 

 

▲ 글-문영 시인·비평가

글-문영
시인·비평가
1988년 <심상> 신인문학상
2003년 <시로여는세상> 평론등단
시집 <소금의 날> 외 2권
울산문학상 수상
현 <문학울산> 주간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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