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⑥

▲ 태국 불교건축의 모든 형식을 볼 수 있는 아유타야 역사유적공원.

태국 옛수도이자 문명중심 아유타야
종교 같아도 포악한 전쟁생리 우선
미얀마와 전쟁에 사원등 전부 파괴
신앙 근본은 ‘사랑·평화’에 있지만
인류역사에도 많은 ‘종교전쟁’ 발발
탐욕에서 생긴 증오로 파괴 일으켜

태국 역사에 정통하지 않은 여행객들이라면 대부분 수도 방콕을 태국 역사의 중심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방콕이 수도가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는다. 400년 전에는 나라의 이름도 시암(Siam)이었고 그 수도이자 문명의 중심은 방콕에서 북쪽으로 60㎞ 쯤 떨어진 아유타야(Ayutthaya)에 있었다. 오늘날에는 방콕의 주변도시에 불과하지만 14세기 이래 400년간 그곳은 아유타야 왕국의 수도로서 태국문명의 중심이었다.

태국에서 상좌부 불교의 전통이 확립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11세기 무렵 버마의 파간왕조는 스리랑카로부터 상좌부 불교를 전수받았고, 이는 수코타이 왕조에 전달되었다. 아유타야는 수코타이로부터 불교의 전통을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국교로 삼아 진흥시켰다. 이후 베트남, 말레이 반도, 심지어 스리랑카에까지 상좌부 불교를 전파했으니 종주국의 지위를 두고 미얀마와 경쟁할 정도로 교세를 떨치게 된다.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데 천재적 자질을 타고 난 아유타야의 불교문화에 다양한 유전인자가 섞이게 된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융성했던 아유타야 불교문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아유타야 역사유적 공원이다. 지금은 비록 온전히 남아있는 것이 없지만 태국 불교건축의 모든 형식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가장 흔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하부에서 종 모양을 이루다가 올라가면서 가늘어지는 형식이다. 바로 체디(chedi)라고 부르는 불탑이다. 이러한 형식의 불탑은 미얀마와 몬족을 통해 수입된 것인데 그 원조는 스리랑카라고 할 수 있다. 태국의 체디는 보다 더 늘씬한 경향을 보이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이와는 달리 마치 옥수수처럼 뭉툭하게 솟는 불탑의 형식도 볼 수 있다. 바로 프랑(prang)이라고 부르는 불탑이다. 선주민이었던 크메르인들로부터 전수받은 것인데 수코타이 지역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 원래 힌두탑인 시카라(sikhara)에서 기원이 된 것으로 추정한다. 캄보디아의 앙코르 지역이나 인도네시아의 힌두사원에서 석조로 만든 유사한 형식을 찾을 수 있다. 다만 태국의 프랑은 벽돌로 쌓아 만들었고 문양이 세밀하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거대한 탑 앞뒤로 직사각형의 건물이 나타나는 것은 불교건축이 아유타야 시대에 토착화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바로 몬도프(mondop)라고 부르는 불전(법당)이다. 원래 힌두 사원에서 탑 안으로 들어가는 현관 홀(mandapa)에 해당하는 건물에서 기원했다고 하나 태국 사원에서는 탑과 불전이 분리되어 예배의 중심이 되었다는 점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다. 오늘날 태국 사원의 가장 뚜렷한 특징인 화려한 목조지붕의 불전들이 여기서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찬란했던 당시의 모습은 상상 속에서만 그릴 수 있을 뿐 실재하는 것은 처참한 폐허의 현장이다. 탑이든 건물이든 그 많은 유적 중에 당시의 모습이 온전히 남아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세월이 흘러 노후되거나 쇠락한 것이 아니다. 건물은 파괴되었고, 황금 탑은 껍질을 벗겨 놓았다. 신체가 멀쩡한 불상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팔, 다리, 머리를 잘라 불구로 만들어 버렸다. 증오가 아니면 설명하기 어려운 파괴의 현장이다. 나무뿌리가 휘감고 있는 부처의 머리는 슬프게도 아유타야 최고의 관광거리가 되고 말았다.

바로 미얀마와의 전쟁에서 벌어진 일이다. 18세기 미얀마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한 꼰바웅 왕조는 아유타야를 침공하여 점령하기에 이른다. 약탈과 파괴는 승리자들의 전리품이었다. 같은 상좌부 불교를 신봉하고 있다는 종교적 동질성도 전쟁의 생리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사원도 불상도 그저 패전국의 유산이었을 뿐이다. 그것이 찬란할수록 시기와 증오는 깊어지게 마련인가 보다. 그렇다고 특정민족의 포악성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19세기 태국인들 또한 라오스를 침공했을 때 같은 정도의 횡포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 강연환 울산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과연 종교는 인류의 평화와 공존에 기여해 왔을까?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전쟁은 인류역사에서 수없이 찾을 수 있다. 7~8세기 이슬람교도들은 ‘칼과 코란’을 들고 알라의 이름으로 이교도들을 정복했고, 11~13세기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성지회복이라는 깃발을 들고 이슬람 사회를 침공하여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였다. 16~18세기에 유럽을 휩쓴 신·구교간의 전쟁은 신앙의 차이를 학살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20세기 발칸반도의 전쟁은 종교와 인종의 차이를 근거로 잔혹한 폭력과 파괴를 이어갔다.

이루 열거할 수 없는 종교 전쟁의 참상은 정작 신앙의 본질과는 관계가 없다. 어떤 종교의 성인도 신앙이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차별하라고 말한 적이 없으며, 이교도에 대한 살육과 약탈이 정당하다고 가르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사랑과 평화, 포용은 모든 종교의 근본 신앙이며, 교리가 아닌가. 하지만 역사에 보듯이 나와 다른 신을 믿는 사람은 이교도이며 이단일 뿐이다.

아유타야의 폐허 위에서 도시의 흥망을 생각한다. 짓는 것도 역사이고, 허무는 것도 역사이다. 지을 때는 지을 이유가 있었던 것처럼, 허물 때도 허물 이유가 있는 법이다. 아유타야에서 태국인들은 부처와 함께 사는 꿈을 꾸었을 터이다. 그것은 바간에서 미얀마인들이 꾸었던 꿈과 다를 바가 없었으리라. 그것을 파괴한 것은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 배타와 증오를 무기로 하는 인간의 탐욕일 뿐이다. 강연환 울산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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