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정민 울산문화재단 기획경영팀 차장

14세기 등장한 르네상스는 여러 모로 독특한 성격을 갖고 있다. 기독교 중심의 중세와 구분짓는 것이 르네상스건만 그 시작점에 있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 성직자인 프란체스코였다는 점과 르네상스를 주도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은 당시 철저한 기득권이었기 때문이다. 세계사의 주요한 변화들이 기득권에 반하는 혁명의 요구였던데 반해 르네상스는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다 르네상스의 중심지인 베네치아, 피렌체는 유럽에서 잘나가는 상공업 국가였으나 그렇다고 중심지는 아니었다. 당시의 유럽은 교황을 정점으로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이 중심이었고, 이 두 세력이 서로 대치하면서 에스파냐, 영국 등 국가들이 합종연횡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르네상스는 마치 ‘부산물’처럼 튀어나온 것이다. 대항해 시대라는 시대적 변화가 있긴 했으나 르네상스의 등장은 시대적 요구라기보다 마치 의식의 변화에 가까웠다.

하지만 르네상스가 갖는 역사적, 문화적 의미는 결코 가벼이 여길 순 없다. 당시 르네상스의 중심지는 베네치아와 피렌체였는데, 특히 피렌체는 인구가 10만명이 채 되지 않는 도시국가였음에도 메디치 가문이라는 막강한 권력층의 주도 아래 르네상스를 이끌어갔다. 금융업으로 부를 쌓은 메디치 가문은 문화예술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조반니 디 메디치로부터 시작된 후원활동은 후대인 코시모와 로렌초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현재 기업들의 사회공헌(SCR) 활동이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번성한 증거는 피렌체 출신 또는 피렌체를 거쳐간 인물들만 나열해도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단테, 조토, 브루넬리스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다. 이처럼 피렌체의 르네상스는 메디치 가문의 비호 아래 꽃피우게 된다. 당시 피렌체는 공화정 국가였으나 사실상 메디치 가문의 도시와도 다름없었다.

하지만 찬란하던 르네상스는 유럽의 격변하는 정세 속에 피렌체를 비롯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쇠퇴와 맞물려 소멸되고 만다. 그 배경엔 메디치 가문 출신 교황인 레오 10세의 무능이 있었다. 르네상스를 꽃피운 것은 메디치 가문이었지만 그 종언 또한 메디치 가문이 주도한 것이다. 그렇게 르네상스는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지게 된다.

르네상스가 남긴 흔적은 여전히 우리의 의식 속에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그 이유는 어쩌면 르네상스의 중심에 문화예술이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 이토록 문화예술이 중심이 되어 꽃을 피웠던 적이 있었던가. 이것이 문화예술의 힘이다. 이를 근거로 우리는 문화예술을 통해 현재의 르네상스를 꿈꾸고 희망한다. 르네상스로 꽃핀 문화예술, 문화예술로 꽃핀 르네상스, 이처럼 문화예술이 남긴 향기는 우리의 의식 속에 이토록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다.

서정민 울산문화재단 기획경영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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