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박물관서 이달 30일까지 마련
명성황후 글과 박영효 감정서 전시
흥선대원군 그림·원세개의 답글도

▲ 경상일보 창간 30주년 특별전 ‘보묵전’에서 명성황후 글씨와 감정서를 관람하는 사람들. 울산박물관 1층(2전시실).

명성황후(1851~1895) 만큼 우리 가슴을 저리게 만드는 역사인물도 드물다. 명성황후의 성장부터 입궁, 궁중에서의 생활과 정치, 안타까운 죽음에는 언제나 그의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그림자가 함께 한다.

경상일보 창간30주년 특별전 ‘보묵(寶墨)-근대미술로 가는 길목’전이 열리는 울산박물관(6월30일까지)에서는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이 남긴 글과 그림을 동시에 관람할 수 있다.

▲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묵란도’
울산박물관 2층(역사관) 전시.

명성황후가 25세이던 1874년, 오빠인 민승호(명성황후 친부 민치록의 양자)는 흥선대원군을 권좌에서 축출하려다 오히려 화약이 터지면서 본인은 물론 일족이 몰살당하는 참변을 당했다. 그로부터 8년 뒤 민씨 척족의 중심이 된 민겸호(민승호의 친동생)는 신식 군대인 별기군 창설과 훈련을 주관했으며 선혜청(조세의 출납을 관장하던 관청) 당상 겸 병조판서를 지냈다. 구식 군인들은 13개월 만에 선혜청에서 받은 녹봉에서 겨와 모래가 섞여 나오자 흥선대원군을 전면에 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바로 임오군란이다. 민겸호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다 오히려 그 일파와 함께 반란병에 붙잡혀 살해됐다. 명성황후는 궁녀 복장을 한 채 허둥지둥 궐문을 빠져나가 충주 산골에서 은거했다. 민씨 일가는 청나라 군대의 힘을 빌려 반란을 진압했고 흥선대원군은 청나라로 소환됐다.

명성황후는 한편으로는 청나라와 러시아를 활용한 외교술로 한반도를 병합하려는 일본의 야욕을 번번이 좌절시켰다. 하지만 외세에만 의존한 외교는 한계가 분명했다. 1895년 10월8일 새벽 건천궁에서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지휘하는 낭인에 의해 황후가 시해된다. ‘을미사변’으로 불리는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울산박물관 1층 보묵전에 전시된 명성황후 글씨는 ‘효제충신(孝悌忠信) 예의염치(禮義廉恥)’에 관해 밝히고 있다. 명확하게 언제 쓴 것 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황후의 글씨 옆에는 갑자년(1924년) 늦여름(음력 6월) 이강(의친왕)과 박영효가 이를 뒤늦게 확인한 뒤 ‘금석지감(今昔之感)을 금하지 못하겠다’고 토로한 감정서가 함께 전시돼 있다.

황후 사후 3년 뒤 사망한 흥선대원군(1820~1898)은 수많은 그림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 중 ‘묵란도’ 한 점이 최근 박물관 2층 상설역사관(무료관람)에 새롭게 전시됐다. 실각 이후 청나라에 갔던 대원군이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 그를 도왔던 원세개에게 그려 준 것이다. 작품 상단에는 ‘그림을 감상한 뒤 흠을 지적해 달라’는 대원군의 글씨와 그 아래 원세개의 친필 답글이 함께 남겨져 있다.

보묵전 전시는 30일까지. 7000원, 단체(15인이상) 6000원, 청소년·보훈 4000원. 홍영진기자 thinpizza@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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