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太和江百里
20. 천전리 각석(하)

▲ 진흥왕과 지몰시혜비가 거닐었던 천전리 각석과 건너편 공룡발자국 암반.

나이 6살에 어머니를 따라 천전리 각석에 놀러 왔던 심맥부지(진흥왕)는 이듬해 7살 때 진흥왕으로 등극했다. 심맥부지는 14년 전 아버지 사부지 갈문왕과 그의 애인 어사추여랑간의 사랑을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6살의 심맥부지는 그저 천전리 각석 앞의 시냇가를 뛰어놀았고 거대한 공룡발자국이 찍힌 각석 건너편 바위암반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었으리라.

그러나 어머니 지몰시혜비의 가슴은 찢어졌을 것이다. 남편 사부지 갈문왕은 이미 죽었고, 다시 찾아온 천전리 각석에는 사부지 갈문왕과 어사추여랑의 사랑 이야기만 적혀 있으니 애통한 마음을 가눌 수 없었을 것이다.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몰시혜비
남편 죽은 뒤 그의 흔적 남아있는
천전리 각석에 아들과 함께 행차
7살에 즉위, 36년간 재위한 진흥왕
한강 손에 넣는 등 영토확장 나서
화랑 창설과 황룡사 창건 등 업적
울진 성류굴에도 진흥왕 행차 명문
지난 5월에 처음 발견돼 눈길 끌어

◇정복군주 진흥왕

진흥왕(재위 540~576년)은 법흥왕에 이어 7살에 즉위했다. 어린 나이였으므로 태후가 섭정(攝政)을 했는데, 그가 바로 지몰시혜비(지소부인)다. 국왕이 직접 정사를 돌보기 시작한 시기는 551년 연호를 ‘개국(開國)’이라고 한 시점으로 추정된다. 지몰시혜비는 10년 동안 통치하면서 진흥왕을 강력한 군주로 만들었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아 나갔다. 545년에는 거칠부에 명해 <국사(國史)>를 편찬했다.

진흥왕이 본격적으로 전면에 등장한 것은 551년이었다. 진흥왕은 551년 백제와 연합해 한강유역까지 진출했으며, 553년에는 한강까지 손에 넣었고, 554년에는 관산성(옥천)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전사시켰다.

이 시기에 김무력(김유신의 조부)이 군사 분야에서 큰 활약을 해 562년 대가야를 멸망시켰다.

왕은 북한산뿐만 아니라 함경도 땅인 황초령, 마운령까지 두루 섭렵하고 각 지역에 순수비를 세웠다. ‘순수(巡狩)’는 중국의 황제인 천자(天子)가 천하를 돌아다니며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지방관들이 백성들을 잘 다스리고 있는지를 살펴보던 관례다. 진흥왕은 이 외에도 화랑도 창설, 흥륜사 준공, 황룡사 창건, 동축사 건립 등의 업적을 남겼다.

▲ 울진 성류굴에 새겨진 진흥왕 행차 명문.

◇진흥왕 계보도

천전리 각석의 원명(原銘)에는 법흥왕 12년(525) 갈문왕이 우매(友妹), 즉 벗으로 사귀는 누이인 어사추여랑과 함께 왔다고 적혀 있다. 갈문왕은 왕의 동생이나 가까운 혈족이 차지하던 최상위 지위를 뜻하는데, 법흥왕 시대의 갈문왕은 왕의 동생인 사부지(徙夫知), 즉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을 말한다. 갈문왕의 우매(友妹) 어사추여랑은 혼인을 약속한 근친 관계의 여인이었다. 신라 왕실에서는 혈통을 순수하게 보존하기 위한 근친혼이 많았다.

법흥왕 26년(539) 입종갈문왕의 부인인 지몰시혜비(지소부인)는 자신의 어머니 부걸지비(보도부인)와 아들 심맥부지(훗날 진흥왕)와 함께 천전리를 찾았다. 지몰시혜비는 법흥왕의 딸이자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태후다. 입종갈문왕이 법흥왕의 친동생이므로 지몰시혜비는 입종갈문왕의 친조카가 된다. 삼촌과 조카가 결혼하여 진흥왕을 낳은 것이다.

◇왕실 소속부

천전리 각석 명문을 비롯한 6세기 초반의 금석문에서 보면, 국왕인 법흥왕은 탁부(양부)에, 동생인 사부지갈문왕은 사탁부(사량부)에 소속돼 있었다. 신라 왕실은 탁부와 사탁부에 속하였는데 이를 2부 체제라 일컫기도 한다.

6세기에는 주로 왕의 동생이 갈문왕 자리에 있었다. 갈문왕도 ‘왕(王)’으로 표기했으며, 갈문왕 부인인 지몰시혜비도 ‘왕비(王妃)’라고 불렀다. 갈문왕은 신라 초기에 다른 족단(族團)의 우두머리에게 주는 지위였으나, 4세기 중반에 김씨 지배체제가 강화되면서 김씨 족단 내의 인물이 여기에 임명되었으며, 왕의 동생이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왕호(王號)의 변화

신라의 왕호는 520년대까지 ‘매금왕’이었으나, 530년대 중반에 가서는 대왕(大王), 태왕(太王)으로 격상되었다. 천전리 각석 명문 기미명(539)에 법흥왕은 무즉지태왕으로, 을묘명(535년)에서는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이라고 표기돼 있다. 이는 국왕의 위상이 달라졌음을 말한다. 매금(寐錦)이란 단어는 광개토왕릉비, 중원 고구려비, 일본서기,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 등장하는 군주의 칭호다. 광개토왕릉비에는 ‘신라의 매금이 직접 와 조공을 바쳤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중원고구려비에는 무려 6번이나 매금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울진 성류굴의 진흥왕 행차

지난 5월 울진 성류굴(천연기념물 제155호)에서 신라 제24대 진흥왕이 560년에 다녀갔다는 명문이 나왔다.

확인된 명문은 삼국사기 등 문헌에 나오지 않는 자료다.

울진 성류굴에 신라 화랑뿐만 아니라 신라의 임금이 다녀갔으며 당대 정치·사회 변화상을 알려주는 획기적인 기록으로 평가된다.

문구는 ‘경진년(560년·진흥왕 21년) 6월○일, 잔교를 만들고 뱃사공을 배불리 먹였다. 여자 둘이 교대로 보좌하며 펼쳤다. 진흥왕이 다녀가셨다(행차하셨다). 세상에 도움이 된 이(보좌한 이)가 50인이었다’로 표기돼 있다.

이재명 논설위원 jmlee@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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