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고창 ‘책마을 해리’

▲ 책마을 해리는 ‘낡은 공간의 문화적 재생’ 사례를 확인하려는 방문객들이 줄을 잇는다.

증조부가 일제때 후세교육 위해 부지 기부
월봉마을 나성초등학교 2001년 폐교되자
이대건 촌장이 다시 매입해 문화공간 꾸며
색다른 책공간 ‘책마을 해리’로 탈바꿈

취재·기획·집필·출판까지 ‘누구나 책’
책을 다 읽어야 나올 수 있는 ‘책 감옥’
그림책·시인·만화 학교 등 프로그램 다채
책 영화제는 마을축제로도 인기몰이

어느 지역 할 것 없이 아이들 숫자가 줄고 있다. 그 반대로 재학생 정원을 채울 수 없는 학교는 날로 늘어나 전국 곳곳 폐교하는 학교 숫자도 늘어난다. 울산 역시 아이들이 사라진 마을에 폐교가 생겼고, 그 폐교를 활용하는 방법이 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중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궁근정초등학교는 한동안 미술창작 체험의 장이자 전시장인 ‘다담은갤러리’였다가 지금은 가칭 ‘마을교육공동체거점센터 및 학생체험센터’로 한번 더 변신을 예고하며 시험대에 올랐다.

이처럼 폐교의 재생은 어느 지역 할 것 없이 주목받는 사안이다. 성공사례는 자연스럽게 전국적인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전북 고창에는 ‘복분자’와 ‘장어’와 같이 그 동네의 제일가는 특산품만큼 주목을 끄는 곳이 있다. 바로 시골마을 폐교를 문화의 이름으로 탈바꿈시킨 ‘책마을 해리’다.

▲ 담쟁이가 뒤덮힌 책마을 해리 본관 건물.

책마을 해리는 전북 고창군 해리면 이씨 집성촌인 바닷가 월봉마을에 있다. 2001년 폐교된 나성초등학교를 이대건 촌장이 매입해 2012년 지금의 책마을로 다시 문을 열었다. ‘누구나 책, 누구나 도서관’이라는 공간 슬로건 아래 책마을, 책학교, 박물관, 도서관을 일구는 공동체가 운영되고 있으며 그 곳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이 ‘종이와 활자, 책의 은하계’를 경험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도하고 있다.

나성초등학교 부지는 원래 지역 유지였던 이 촌장의 증조할아버지가 일제강점기(1936) 때 후세교육을 위해 기부한 것이다. 폐교 이후 그 곳이 도축장으로 바뀔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서울에서 20년 넘게 출판계에 종사했던 이 촌장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 ‘폐교에서 책농사 짓는 고창의 해리 포터’ 이대건 촌장.

종이책 시대가 끝날 것이라는 위기감도 적지않게 작용했다. 책과 함께하며 종이책에 스며든 온기와 감성을 지키고 싶었던 그는 고창으로 내려 가 2006년 폐교가 된 증조부의 학교를 사들였고 도시에서는 전혀 시도할 수 없는 색다른 책 공간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책마을 해리에는 기본적으로 17만여 권의 장서를 갖추고 있다. 시간의숲, 바람언덕, 종이숲, 버들눈작은도서관, 책감옥, 마을사진관, 한지공간과 활자공간, 마을책방이 있어 출판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다.

▲ 교실을 개조한 책 전시

하지만 이 곳을 다녀가는 사람들은 방대한 도서 규모보다 그 속에서 일어나는 책 관련 프로그램에 더 놀란다. 폐교를 고쳐 책 학교를 열고, 고창의 갯벌부터 염전, 고인돌, 판소리, 동학 같은 고창의 생태, 문화, 역사, 예술을 체험한 후, 책으로 엮는 출판캠프에 이르기까지 실로 책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다양한 책 문화를 경험한다.

우선 이 곳에선 남녀노소 누구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책으로 펴낼 수 있다. 일명 ‘누구나 책’ 사업이다. 이 사업과 연계해 만들어진 ‘밭메다 딴짓거리’는 이 동네 70~80대 할머니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 그림으로 그려 그림책을 펴낸 것이다.

▲ 교실을 개조한 책 전시

할머니 그림 솜씨가 얼마나 빼어났던지 책을 본 독자들이 ‘원화’를 확인하겠다고 찾아올 정도였다. 기교를 부리지않은, 더없이 순수한 할머니의 그림은 상상 이상으로 짙고 긴 여운을 안겨줬다.

‘누구나’ 책을 낸다고 그 질적 수준을 의심해서는 큰 코 다친다. 고창여고생들이 경주지진을 소재로 펴낸 ‘흔들리며 흔들리지 않고’는 지난 2017년 세종도서(우수출판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지금까지 출판된 책만 90권이 넘는다. 이 중에는 3쇄를 한 책도 있다.

▲ 별관을 리모델링해 만든 도서관.

이밖에도 책으로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지 만들기, 닥돌(한지 재료인 닥을 펴서 말리는 돌) 체험, 그림책학교, 시인학교, 만화학교, 책 영화학교 등 책에 관한 거의 모든 프로그램들이 운영된다. 지난 2016년부터 책을 주제로 한 영화제도 운영하고 있다. 책 영화제는 마을축제다. 할머니 할아버지 관객을 위해 인근 학생들이 특별 더빙한 영화는 영화제의 백미다. 매주 토요일 운영되는 그림책 작가 교실, 청소년 인문 건축학교도 인기다.

‘책 감옥’이라는 독특한 공간도 있다. 창고를 고쳐 만든 작은 방에는 읽고 싶은 책을 들고 가서 다 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한다. 소설가 조정래가 표현한 ‘글 감옥’이란 표현에서 따 왔다. 이름이 신기해서인지 책마을을 방문하는 아이들에게 오히려 더 인기다. 책을 싫어하는 아이들도 그 곳에서는 꼼짝 않고 책을 읽어야 한다. 벽면에 그려진 재미있는 그림이 웃음을 자아낸다.

 

이대건 촌장은 “아이들에게 스스로 기자가 되어 취재를 하고, 책을 쓰는 작가가 되어보는 경험을 안겨주고자 한다. 머릿 속 생각이 메모가 되고, 기록이 출판되는 과정을 체험하게 만든다. 책을 기획하고, 쓰고, 편집하고, 전통 방식으로 제본하는 등 책과 관련된 모든 체험을 함께 꾸려나가고 있다. 그러자니 힘도 든다.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해마다 새로운 기획이 필요하다. 그래야 국비든, 지방비든 사업비도 받을 수 있다. 책마을 슬로건 ‘누구나 책, 누구나 도서관’이 지켜지도록 천천히, 꾸준히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홍영진기자 thinpizza@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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