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뜰히 지어낸 한 그릇 밥, 여기투명한 봉분이 있다 쌀통 안 옴질대던 바구미 한마리 제 숨을 부려놓았다평생을 두고 탐닉한 몇톨의 실박한 세계 그 어느 틈엔가이렇다 할 묘표도 망석도 없이 조용히 빈 몸을 안장시켰을 것이다열망의 모양대로 동긋이 굽은 등과 잦은 시련을 걷던 다리 다시금 길을 밝히던 더듬이까지모두 이 속에 고스란히 흐무려졌을 것이다한 평생 코 박고 몰두하던 곳그곳에 죽어 묻힌다는 것 영원히 하나의 세계만을 신봉한다는 것 과연성자의 최후라 읽어 마땅할 잠언의 기록선연한 계시가 그릇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른다제상 앞 향탁에 머
창문에 빗방울이 지문을 찍는다두드린 자국 자국 흙알갱이들이엉킨다마당귀 보리수나무 잎사귀와잎사귀가붙어 있다, 떨어진다그때 반짝, 일어나는 빛이박수 소리다툇마루에 앉아 처마 끝에 맺힌빗방울을받아먹던 귀는 어디로 갔나완주 구이(九耳)에서 ‘섭(囁)’ 자가 왔다귀가 많고 입이 하나니 더 많이 들으라는 뜻이겠지더 많이 머뭇거리라는 말씀이시겠지보리수나무가 몸을 흔든다뽈똥처럼 맺힌 빗방울이마당으로 내려선 어깨를제 이파리인 양 친다멎은 비 온다 없는 귀를 찾아오고 또 온다“귀 세개, 입은 하나…많이 듣고 머뭇거리길”귀(耳)가 세 개 모인 한자를
으쌰 으쌰한 쪽 다리가 짧은 장애를 가진 넝마주이 사내가왼발 오른발을 피스톤인 양 힘차게 실룩이며독산동 고갯길을 올라가고 있다리어카보다 큰 녹슨 철 대문 한 짝 싣고구안와사 입도 따라 꽃잎처럼 벙그러져신났다기운 내세요! 라는 오래된 갑골문자거룩한 것들은 왜 모두아프거나 가난한가“삶의 파고를 인내하고 마주보려는 자세를…”이란 감독 마지드 마지디의 이란 영화에는 큰딸의 보청기가 고장 나 고심하는 차에 설상가상으로 직장까지 잃게 된 카림이란 사내가 나온다. 카림은 고물 오토바이로 운전 일을 하면서 온갖 물건을 실어 나르는
아주 늙은 개와 나란히 걸어가는 뒷모습어쩐지 걷는 게 불편해 보여옳지 그렇게 천천히 괜찮으니까올라가서 이렇게 기다리면 돼어느 쪽이 아픈지 알지 못한 채둘만 걸을 수 있도록길이 칼이 되도록귤을 밟고 사랑이 칸칸이 불 밝히도록여섯 개의 발바닥이 흠뻑 젖도록“느리지만 오래도록 함께 발 맞춰 걷는 길”시를 읽다 오랜만에 마음이 환해졌다. ‘귤을 밟고 사랑이 칸칸이 불 밝히도록’이란 구절을 읽으며 아랫목 이불 속에 발을 넣고 언니들과 귤을 까먹으며 만화책을 보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따뜻한 주황빛, 새콤달콤한 맛, 껍질을 까면 작
목련꽃 지는 모습 지저분하다고 말하지 말라순백의 눈도 녹으면 질척거리는 것을지는 모습까지 아름답기를 바라는가그대를 향한 사랑의 끝이피는 꽃처럼 아름답기를 바라는가지는 동백처럼일순간에 져버리는 순교를 바라는가아무래도 그렇게는 돌아서지 못하겠다구름에 달처럼은 가지 말라 청춘이여돌아보라 사람아없었으면 더욱 좋았을 기억의 비늘들이타다 남은 편지처럼 날린대서미친 사랑의 증거가 저리 남았대서두려운가사랑했으므로사랑해버렸으므로그대를 향해 뿜었던 분수 같은 열정이피딱지처럼 엉켜서상처로 기억되는 그런 사랑일지라도낫지 않고 싶어라이대로 한 열흘만이라도
개의 목줄을 놓아버리면 개는 새가 될까여름에는 멍청한 벌레를 그릴 거야플라스틱 돼지 저금통을 가르면플라스틱 공간이 생겼다용돈을 한꺼번에 써버리는 것손톱을 물어뜯는 것고쳐야 할 습관이었다나 대신 반성하는 꽃을 그렸다가위 바위 보를 하면패배하는 청소년이 생겼다숨거나 은밀해지는 순간이었다오징어를 씹으면턱이 서양 배우처럼 단단해졌다외국 배우의 사진을 오려 벽에 붙였다나는 코가 너무 낮았다비틀스의 렛잇비에선 죽은 향나무 냄새가 났다청소년은 쑥쑥 자라야 했다나는 실패하는 법을 알았다생일이었다“어른, ‘실패’라는 한계를 알게되는 일”1960년대
봄이고 밤이다목련이 피어오르는 봄밤이다노천까페 가로등처럼덧니를 지닌 처녀들처럼노랑 껌의 민트향처럼모든 게 가짜 같은도둑도 고양이도 빨간 장화도오늘은 모두 봄이다오늘은 모두 밤이다봄이고 밤이다마음이 비상착륙하는 봄밤이다활주로의 빨간 등처럼콧수염을 기른 사내들처럼눈깔사탕의 불투명처럼모든 게 진짜 같은연두도 분홍도 현기증도오늘은 모두 비상이다오늘은 모두 비상이다사랑에 관한 한 우리는 모두 조금씩 이방인이 될 수 있다그해 봄밤 미친 여자가 뛰어와 내 그림자를 자신의 것이라 주장했던 것처럼갈피를 잡을 수 없이 변덕스레 찾아온 봄밤목련이 피어
쥐들에게 사랑이 있다잖아.실험을 해봤대.그렇다면 인간에게도 사랑이 있을지 모르지.사랑은 인류를 위협하고 통제하는 오래된 책일지 몰라.읽어봤어?어쩌면 삶에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다.그 책은 공개하지 않는대. 어디 있는지 사서들도 모를걸.나는 겹낫표처럼 생긴 귀를 움직이며아무 의미 없는 문장을 받아 적는다.의미없는 곳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인간의 사랑폐가식 도서관은 도서목록에서 자료를 확인한 뒤 대출표를 작성해 책을 빌리는 도서관이다. 지금은 도서관이 대개 개가식이나 반개가식으로 운영되니, 요즘 폐가식 도서관은 고서나 희귀본 등을 소장하
자유에 대해 말한다면 손톱만큼 치열한 경우도 없다 나에게 처음으로 죽음을 가르쳐준 그것은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뱃머리 같은 것수평선 너머로 사라진 배의 행방을 알 수 없듯 나는 잘려나간 손톱이 간 곳을 모른다한때는 호미날이 되어 풀을 매고 아이의 손가락에 박힌 가시를 뽑아주기도 하였다 항상 몸통보다 먼저 가서 더러움과 치욕을 견디고 꽃의 속 그 깊은 곳의 부드러움과 뜨거움을 내게 알려 주었던 전위의 촉수붉은 피가 흐르는 펜촉을 나는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몇 번이고 바위를 찧는 독수리의 부리처럼 깨어지고 잘리어도 다시 돋는 신생의 힘
불을 끄고 방 안에 누워 있었다누군가 창문을 잠시 두드리고 가는 것이었다이 밤에 불빛이 없는 창문을 두드리게 한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이곳에 살았던 사람은 아직 떠난 것이 아닌가문을 열고 들어오면 문득 내가 아닌 누군가 방에 오래 누워 있다가 간 느낌이웃이거니 생각하고가만히 그냥 누워 있었는데조금 후 창문을 두드리던 소리의 주인은 내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들을 두드리다가제 소리를 거두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중략 -언젠가 나도 저런 모습으로 내가 살던 시간 앞에 와서 꿈처럼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방 곳곳에 남아 있는
엽서를 쓰고 우표를 붙였다짧고 가는 문장이 두 줄로 포개져 있었다읽을 수 있을까, 이 비틀거리는새의 말을 쓸쓸한 발톱이 휘갈겨 쓴마음의 잔해들을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을 따라갔다가다 멈추고 공원 근처가까운 편의점에서 생수와 빵을 샀다벚나무 아래 나무의자에는 녹지 않은 눈이 가득했다녹을 수 없는 눈과녹지 않는 눈의 차이는 무엇일까나는 엽서를 꺼내 그 두 줄의 문장에서희고 간결한 새를 꺼내 날려 보냈다꾹꾹 눌러쓴 육필, 떠나보내지 못한 간절함이…편지를 써서 우체통에 넣은 적이 언제였던가. 메일과 카톡이 일상화되고
글쎄, 해님과 달님을 삼백예순다섯 개나공짜로 받았지 뭡니까그 위에 수없이 많은 별빛과 새소리와 구름과그리고 꽃과 물소리와 바람과 풀벌레 소리들을덤으로 받았지 뭡니까이제, 또다시 삼백예순다섯 개의새로운 해님과 달님을 공짜로 받을 차례입니다그 위에 얼마나 더 많은 좋은 것들을덤으로 받을지 모르는 일입니다그렇게 잘 살면 되는 일입니다그 위에 더 무엇을 바라시겠습니까?새날, 너그럽고 순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길해가 바뀐 지 한 달이 지났다. 아니, 벌써? 하는 일 없이 1월이 가버렸다. 올해는 운동해야지, 영어 공부를 해야지, 책 좀 읽어
다시 이 삶은 혼자 서 있는 시간으로 충만할 것이다아주 튼튼하게 혼자여서비로소 이 세상에 혼자인 것들과혼자가 아닌 것들을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그러니 잘 지나간 것들은 거듭 잘 지나가라나는 이제 헛된 발자국 같은 것과 동행하지 않는다혼자가 아닌 것은더 이상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이승이 아니니“홀로 우뚝선 나무처럼 단단한 혼자가 될 것”겨울이 되어 무성한 잎이 떨어지면 비로소 나무의 모든 것이 잘 보인다.이웃 나무와 어깨를 겯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홀로인 나무. 나뭇잎이 걷히니 나무의 눈에도 세상 풍경이 잘 보일 것이다.어떤 면에
다람쥐 볼은 도깨비 자루라서여문 도토리가 한 자루알밤이 한 자루기름진 잣이 한 자루나무가 되고숲이 되고돌고 돌아 흙이 되지다람쥐 볼은 볼록볼록 배부른 아기집이라서비단벌레를 낳고붉은박쥐를 낳고하늘다람쥐를 낳고참수리를 낳고스라소니를 낳지우리가 진즉에 지워버린 이름들순진하고 무구한 다람쥐는흙도 나무도 숲도비단벌레도 붉은박쥐도 하늘다람쥐도 참수리도 스라소니도자기가 낳은 줄 모르고입안 가득 도토리를 물고 숲으로 가네 함께 살아갈 숲과 생명을 만드는 ‘다람쥐’볼주머니가 불룩한 귀여운 다람쥐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생태시’다. 다람쥐는 물어 나른
오래 소장하고 싶다면이 책은 표지만 읽어야 한다첫 쪽을 쓰다가 고스란히 백지로 남겨둔이 육신을 눈으로만 읽어야 한다이면과 내지가 한 몸통인 그를몇 장 넘겨보기도 했지만뒤집을 때마다 생살 타는 냄새가 나는이 책은 너무 오래 읽어서는 안 된다그 기록은 물로 쓰고 소금으로 새겨져서팍팍하고 짤 뿐만 아니라 비릿한등 푸른 언어와 유선형 문장은 쉽게 타버린다쉽게 부서지고 쉽게 헤져서가시와 살점이 지글지글 뿜어내는 푸른 바다와바다의 내밀한 구전을 다 읽지 못하게 된다슬쩍 넘기다 우연히 본그를 읽을 때는 그 백지마저 조심스레젓가락으로 한장 한장
거두절미의 자세가 저것일까. 세상사 밑바닥 혼자 견디는 겨울 강을, 꽝꽝 얼어 혹독한 빙판에 이마도장 무릎도장 새겨넣듯 오직 한 가지 자세로 드문드문 놓아준 억새방석마저 밀쳐놓고, 천만 개의 손으로 잔등을 덮어주려 다가서는 함박눈마저 거절하고, 삶의 급물살에서 빠져나와 숨소리도 납작 엎드린 겨울 강을, 어서 몸 일으키라고 잡아끄는 북풍의 가슴깃도 끝끝내 털어내는 저 겨울 강의 시린 어깨를, 본다. 따순 물 한 숟갈 떠 넣어주려 무릎 세우다 어둠 속에 주저앉는 저녁노을의 눈꼬리도 가만가만, 눈물 마를 때까지 본다.타협없이 제 갈 길을
새의 노래를 듣기 위해 새장을 사지 않고주머니를 꺼내 모이 그릇에 채워놓지 않고한 그루 나무를 심고 물을 주며향기로운 그늘을 키우는 사람이 있다꽃을 꺾어 창가에 놓지 않고꽃씨를 뿌리며 그 꽃씨가 퍼져나가세상을 물들이는 꿈을 꾸는 사람이 있다제 몸의 온기를 나누어쫓기고 지친 마음을 껴안을 수 있다면한 뼘은 더 따뜻해질 것이다우주의 시간이 빛날 것이다새해 첫 마음 한 발, 첫 발자국,내 안의 바로 너나 또한 세간의 문을 열고 그 길에 한 걸음내딛는 시작이기를새로운 한 해 맞아 모두를 위한 행동 실천하길인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을 한
그래, 잘 견디고 있다여기 동쪽 바닷가 해송들, 너 있는 서쪽으로 등뼈 굽었다서해 소나무들도 이쪽으로 목 휘어 있을 거라,소름 돋아 있을 거라, 믿는다그쪽 노을빛 우듬지와이쪽 소나무의 햇살 꼭지를 길게 이으면 하늘이 된다그 하늘길로, 내 마음 뜨거운 덩어리가 타고 넘는다송진으로 봉한 맷돌편지는 석양만이 풀어 읽으리라아느냐?단 한 줄의 문장, 수평선의 붉은 떨림을혈서는 언제나 마침표부터 찍는다는 것을하나의 바퀴처럼 다시 떠오르는 ‘붉은 마침표’옛사람들은 해가 부상(扶桑)에서 떠서 함지(咸池)로 진다고 믿었다. 이 시에서는 동해와 서해
지구의 문짝 하나가 어디쯤에서 휘어졌을까수많은 문짝들, 그것들을 이은 셀 수 없이 많은 경첩들 중에서몇 개의 나사가 튕겨져 버린 걸까걸어가는 길 사이로 밭들이 삐걱삐걱 소리를 낸다어긋난 경첩이 내는 소리들을 눈으로 보는 고통이라니밀감과수원 나무 아래 노랗게 무덤이 된 농익은 밀감들과갈아엎어져 흙 속에 묻힌 양배추 월동 무 브로콜리들채소들의 홀로코스트다생산량 예측불가와 수요공급의 불균형이어긋난 경첩처럼 오래된 미래*를 삐걱거리게 한다저 낮은 밭담들은 다시 무언가를 담고 비우고를 되풀이 하겠지이른 봄인데 계절풍은 스스로 제 이름을 잊은
가위는 가로지르는 도구다. 가위는 하나였던 세계를 둘로 나누고 영원한 밤의 골짜기를 만들고 한 사람을 절벽에 세워두고 목소리를 듣게 한다. 발아래, 당신의 발아래 내가 있으니 그냥 돌아가지 말아요.절벽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가위는 있다. 그는 밤 가위로 밤을 깎는다. 밤의 껍질은 보기보다 단단하다. 밤으로부터 밤을 구해내려면 밤도 감수해야 한다. 피부가 사라지는 고통을. 그래도 조각나지는 않는다. 밤 가위는 밤의 둘레를 따라 천천히 걸어 하나의 접시에 당도한다. 당신 앞에 생밤의 시간이 열릴 때까지.당신 발밑으로 이유 없이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