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환의 述而不作(술이부작) (9)신라사 사료로서의 ‘쿠쉬나메’

 

한양대 이희수 교수는 <한국과 이슬람문화> 등 여러 저술에서 이슬람의 서사시 ‘쿠쉬나메’를 소개했다. 그는 2012년 10월 5일 처용학술제에서 발제한 ‘글로벌 역사흐름으로 본 처용의 재조명’에서 이를 논거로 하여 처용이 이슬람상인 피난민이라는 논지를 펼쳤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하여 처용이 나타난 개운포가 신라시대 국제무역항이라고도 했다. 이로 인해서인지 오늘날 울산에서는 처용이 세계성이 담보된 글로벌한 인물이라는 담론이 확산되고 있다.

이 교수가 말하는 ‘쿠쉬나메’의 신라시대사 사료로서의 가치는 이러하다. 먼저 ‘쿠쉬나메’는 11세기 이슬람의 대학자 이란샤 이븐 압달 하이르가 편찬한 장편 서사시이다. 현존하는 필사본은 14세기의 모함메드 이븐 사이드 이븐 압달라 알 까다리가 복사한 것인데, 원본은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쿠쉬나메’는 쿠쉬 장군의 무용담을 담았는데, 여기에는 신라에 관한 서술이 많이 담겨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아랍어·페르시아어 사료보다 훨씬 풍성하고 세세한 내용을 담고있어 사산조 페르시아와 신라의 관계를 알 수 있다. 따라서 한반도 밖에서 신라에 대한 가장 방대한 자료를 담고 있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이란 지도자 아비틴이 신라 공주 프라랑과 결혼하는 내용인
이슬람의 서사시 ‘쿠쉬나메’ 바탕으로 ‘피난민론’ 논지 펼쳐
하지만 쿠쉬나메 속의 Silla는 우리의 신라와 이름만 같을 뿐
당시의 명칭·문화와 다르고 신라·중국의 역사적 기록도 전무
피난민론, 신라라는 이름에 현혹된 추정·견강부회에 불과해

◇‘쿠쉬나메’의 내용

한편 ‘쿠쉬나메’는 등장하는 지명과 인물들의 음역(音譯)이 신라의 지명·인명과 일치하지 않고, 신라 왕실이나 사회에 대한 묘사가 정확하게 신라를 반영하고 있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비교분석적인 방식으로 하나씩 밝혀야 할 과제라고 한다. 

▲ 한양대 이희수 교수는 처용학술제에서 자신이 이란에서 발굴한 고대의 채색화를 소개했다. 이를 아랍의 왕자가 신라의 공주를 만나는 장면이라 했는데, ‘쿠쉬나메’에서 서술한 아비틴과 프라랑의 만남을 연상한 듯하다.

요컨대 이슬람의 서사시 ‘쿠쉬나메’는 신라에 대한 한반도 밖의 귀중한 사료인데, 다만 지명·인명의 음역이 신라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고, 왕실과 사회의 묘사가 신라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지 않아 향후 연구과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랍 혹은 중동사 연구자로서의 이 교수의 평가인데, 한국사, 그 중에서도 신라시대사 연구자들이 ‘쿠쉬나메’를 사료로 검토했다는 소식은 아직은 들리지 않고 있다. 한국사학계에서 이것을 신라시대 연구의 사료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의 반증이 아닐까?

널리 알려진 ‘쿠쉬나메’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하자 이란인들의 지도자 아비틴은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중국의 대혼란기에 이란인들의 안전이 위협받자 주변국 마친왕의 주선으로 신라로 망명했다. 아비틴은 신라왕 타이후르와 폴로 경기를 하거나 사냥을 즐기기도 했다. 또 신라-이란 연합군을 결성하여 신라에 침입해 온 중국군을 물리치고, 중국의 성을 두 달간이나 봉쇄하고 마침내 함락시켜 세력을 대륙에까지 떨쳤다.

전쟁 후 신라로 돌아온 아비틴은 신라 공주 프라랑과 결혼했다. 아비틴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렸고, 공주 프라랑은 아들을 임신했다. 그런 어느 날, 그의 꿈에 신이 나타나 계시했다. 그대의 아들이 아랍의 폭정자 자하크를 물리치고 멸망한 페르시아를 위해 복수하리라는 것이었다. 이에 아비틴은 프라랑과 함께 이란으로 귀국했다.

이란으로 돌아온 프라랑이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파리둔이라 했다. 그러나 아비틴은 자하크에게 잡히고 곧 처형당하고 말았다. 훗날 아들 파리둔은 자하크를 철끈으로 묶고 그의 군대를 물리쳐 이란의 영웅이 되었다. 파리둔은 이 소식을 외조부 타이후르에게 보냈으나 그는 이미 사망했고, 왕위를 이어받은 아들 가람에게 전달되었다. 파리둔과 가람의 우정과 친선은 대를 이어 계속되었다.

◇Silla, Sila, Shila는

우리의 ‘신라’가 아니다

이 줄거리를 읽으면 미심쩍은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먼저 여기에 묘사된 신라가 과연 우리의 삼국시대, 혹은 통일시대의 ‘신라(新羅)’인지 의심스럽다. ‘타이후르’ ‘프라랑’이라는 신라왕·신라공주의 이름이 우선 그러하다. 나아가 신라 공주가 외국인과 결혼했다거나, 신라-이란 연합군이 중국의 성을 함락하여 대륙에까지 세력을 떨쳤다는 내용은 더더욱 미심쩍다.

이러한 사실들은 신라로서는 매우 중대한 사건들인만큼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실렸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단 한 줄의 기록도 없다. 중국측 사료에도 신라가 이란과 연합하여 중국을 침공했다는 기록은 전무하다. 그런 일이 없었다는 뜻이다. 우리와 중국의 사료에서 전혀 찾을 수 없는, 11세기 이슬람의 서사시에 실린 이야기를 신라사 연구의 사료로 채택할 수 있겠는가.

아랍의 문헌에 ‘al-Silla’ 또는 ‘al-Sila’가 등장하는데, 이슬람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를 우리 한반도의 ‘신라’라 한다. 이 교수는 “아랍어로 표기된 al-Shila, al-Sila 등의 지명은 ‘신라’의 음역임이 확실하다” 했고, 한국외국어대 김정위 교수도 “‘al’은 관사이므로 Sila는 ‘신라’의 음역임이 명백하다” 했다. 이들이 우리의 신라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Silla, Sila, Shila를 설명하는 이슬람 문헌을 보면 이것이 과연 우리의 신라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신라는 ‘중국 동쪽에 위치한 나라’라는 막연한 설명은 차치하더라도, 신라가 ‘섬’ 혹은 ‘군도’라는 기록이 여럿 있다. 다음은 이 교수의 저서 <이슬람과 한국문화>에서 찾은 신라에 대한 설명이다.

① 대양의 극동에 신라라는 섬이 있다. ② 중국의 해안 쪽으로 신라라는 섬들이 있다. ③ 중국 저편 동해에 여섯 개의 섬으로 형성된 신라라는 나라가 있다.

이처럼 이슬람 세계에서는 신라를 섬, 여섯 개의 섬, 또는 여러개의 섬(군도)이라 인식하고 있었다. 신라가 섬, 혹은 군도가 아님은 주지하는 사실이거니와, 신라왕 ‘타이후르’와 그 공주 ‘프라랑’ 왕자 ‘가람’이 신라 이름의 이슬람식 음역이 아니라는 것도 너무 상식적이다. 이로 본다면 이슬람 세계가 알고 있었던 Silla, Sila, Shila는 우리의 신라가 아니다. 그것이 섬, 혹은 군도로 이루어졌다거나, 왕과 왕자·공주의 이름으로 보아 동남아시아의 어느 섬, 혹은 군도임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피난민론’의 오류-쿠쉬나메는 신라사 사료가 아니다

이슬람 문헌의 ‘신라’가 우리의 신라가 아님은 다른 기록으로도 입증할 수 있다. 역시 이 교수의 <이슬람과 한국문화>에서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① 신라인은 노아의 아들 야페트, 야페트의 아들 아무르의 자손들이다. ② 이슬람 초기에 알라위들은 박해를 피해 신라로 피신하여 영구정착했다.

노아는 구약성서의 인물인데, 신라인이 그의 후손이 아님은 다시 말할 나위 없다. 알라위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지만, 이들이 신라로 망명해서 정착했다는 말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신라시대에 이슬람인들이 정착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의 사료로써 입증할 수 없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신라도 당연히 우리의 신라가 아니다.  

 

이 교수는 위의 처용학술제에서 자신이 이란에서 발굴한 고대의 채색화를 소개했다. 이를 아랍의 왕자가 신라의 공주를 만나는 장면이라 했는데, ‘쿠쉬나메’에서 서술한 아비틴과 프라랑의 만남을 연상한 듯하다. 그림 속 왕자는 수염을 기르고 터번을 쓴 이슬람인이다. 그런데 공주와 세 시녀도 신체의 굴곡이 드러날 정도의 얇은 윗옷을 입고 채색 치마를 입은 이슬람 여성이다. 이 그림의 무엇이 아랍 왕자와 신라 공주가 만나는 장면을 뜻한다는지 알 수가 없다.

이처럼 이슬람 세계가 알고있는 ‘신라’는 우리의 신라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다만 나라 이름 Silla, Sila, Shila가 신라와 발음이 엇비슷할 뿐이다. 여기에 현혹된 것이 이 교수의 처용은 당나라 황소의 난을 피해 신라로 건너온 이슬람상인이라는 ‘피난민론’이며, 그 방증 자료가 바로 이 ‘쿠쉬나메’이다. 그러나 살핀대로 Silla, Sila, Shila는 우리의 신라가 아니다. 따라서 ‘쿠쉬나메’를 방증으로 한 이교수의 ‘피난민론’은 저들의 ‘신라’라는 이름에 현혹된 추정과 견강부회에 불과하다.

글= 송수환 울산대 연구교수

그림= 최종국 한국미술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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