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이승우와 울산전매서

일본인들이 독식하던 전매서장직, 해방후 첫 한국인 서장 이승우씨가 맡아
동구 남목 출신으로 울산초-대구고보 나와 해방때까지는 대구 전매서 재직
전매서 조직을 한국인 위주로 전환…청빈하게 살아 경제적 어려움 겪기도
그가 살았던 중구 학산동 울산전매서장 관사, 최근 헐리고 고층건물 들어서

서울에는 경복궁과 창덕궁 등 왕궁이 있어 이곳을 찾는 국내외 관광객들이 많다. 그러나 요즘 서울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는 종로구에 있는 서촌과 북촌이다.  

▲ 최근 사라진 중구 학산동에 있었던 옛 울산전매서장 관사. 이 관사는 울산 도심의 마지막 일본식 건물이었는데 건물이 헐리고 이곳에 새로운 고층 건물이 들어서고 있어 울산시민들에게 아쉬움을 준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서로 나누어져 있는 이들 지역에서는 윤동주, 이상, 노천명 등 우리들에게 익숙한 문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어 좋다.

서촌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옛 골목이다. 리어카 한 대도 다닐 수 없는 좁은 길을 꽃들로 아름답게 장식해 놓았고 중간 중간 만들어 놓은 텃밭에서 농촌의 여유로운 생활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옛 진명여고 옆 골목길 담벼락에는 민화를 그려 놓아 옛길도 잘만 손질하면 살아 있는 문화의 거리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촌 옛길이 우리들에게 주는 것은 편안함과 안정, 여유다. 이 길의 깊은 역사를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건물로 일제강점기 건축된 적산가옥이 있다. 한옥 사이에 있는 적잖은 적산가옥이 아름다운 전시관으로 꾸며져 있다.

서울이 이처럼 적산가옥 마저 살려 예술의 미를 살리고 있는데 반해 최근 울산 중심지역 마지막 적산가옥이 뜯겨 아쉬움을 준다.

일제강점기 울산의 중심지였던 성남동과 옥교동에는 일본 사람들이 많이 거주했고 따라서 일본인들이 건축했던 상점과 집이 많았다. 1917년 울산군이 발행한 <울산안내>에 실린 70여개 상업 광고 중 한 두개를 제외하고는 일본 상인들의 광고다. 이것은 당시 울산군 전역의 주요 상점들을 대부분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해방과 함께 차츰 사라졌던 이들 상점과 가옥들은 울산이 공업도시가 되면서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적산가옥 중 지금까지 남아 있었던 것이 학산동 울산 전매서장 관사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아래 전매국이 있었고 이 아래로 각 시도지부에 전매서가 있었다. 당시 울산전매서는 담배와 인삼, 소금을 판매했지만 이들 귀중품을 전매품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일종의 권력기관 행사를 했다.

1924년 12월 1일 조선일보는 ‘가혹한 수색과 공포에 싸인 촌민’이라는 제목으로 ‘언양을 비롯한 경남 다방에는 요사이 총독부 연초전매국원과 울산군 직원 4~5인이 일반 농가의 허가 없는 술과 담배에 대해 엄밀히 수색을 해 다수 위반자를 발견한 후 계속 각 면을 순회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수색 방법을 보면 무시로 농촌 집은 물론이고 사랑채나 안채 구분 없이 온 집안을 수색해 마치 기미년 운동 때 독립단 혐의자를 가택 수색하듯 해 담배나 술이 나오면 용서 없이 처벌을 한다. 그런데 원래 농촌은 몇 모금의 담배는 서로 나누어 피우는 것인데 이렇게 가혹한 수색으로 물금에서 시작해 언양에 이르기까지 위반자 250여명을 찾아내었다’고 보도를 하고 있다.

또 1년 뒤인 1926년1월23일에도 조선일보는 ‘전매국원 등살에 언양 인심이 흉흉’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싣고 있다.

‘경남 언양에는 요사이 부산전매국원이 비밀리에 6~7명 출장 와 삼남면, 하북면, 중남면, 삼동면과 두서·두동방면의 농촌을 돌아다니면서 농촌 가택을 수색하는 바 어리석은 농가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아무 잘못이 없지만 무슨 큰 죄나 지은 것처럼 두근거리는 가슴에 잔뜩 겁을 집어 먹고 어찌할 줄 모르는 모양새가 무슨 큰 난리라도 일어날 것 같은 생각을 하게한다.

이번에 전매서에서 나온 사람들은 각 면에서 수 십 명의 범측자를 발견해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모양인데 반면에 범측자로 지명된 농민들을 보면 이들은 온갖 힘을 다하여 얻은 남의 전답 몇 두락으로 삶의 기둥을 삼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추위와 더위에도 불구하고 갖은 고통을 이겨가면서 전 가족의 노동으로 근근이 연명하여 가는 처지에 있다. 그런데 이들 방 한 구석에서 잎담배 한 대를 두었다고 40~50원의 벌금 처분을 하니 이들이 파산을 당할 지경에 있다.’고 써놓고 있다.

이 기사는 일제강점기 전매서 직원들의 횡포가 심했다는 것과 1926년까지는 울산에 전매서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울산전매서 자리 옆에는 울산읍장 관사도 있어 이 지역이 일본인 주거지의 중심이 되었다. 이 때문에 해방 후 울산지역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돌아갈 때는 전매서 관사가 있었던 앞거리에서 단체로 모여 출발했다. 6·25 때는 울산에 주둔했던 국군 장교들을 집단 수용할 큰 건물이 없었다. 따라서 당시로는 울산에서 가장 큰 가옥의 하나였던 전매서장 관사를 반으로 갈라 장교 식당으로 사용해 점심식사 때면 점심을 먹기 위해 온 장교들의 지프가 전매서장 관사에서 현 중앙동 주민센터까지 줄을 서 있기도 했다.

전매서는 해방 후 울산 전매서장을 했던 이승우(李承雨)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일본인들이 전매서장을 했는데 이씨는 해방 후 울산 전매서장으로 왔다.

관사는 일본식 기와집으로 단층이었지만 건평이 330㎡가 넘었고 마당에는 연못과 석등이 있었다. 관사 건물은 건축할 때 초석을 많이 깔아 기초를 튼튼히 했고 지붕은 시멘트 기와를 덮었지만 물이 새지 않았다. 또 실내에는 천황 사진을 거는 나무 기둥이 있었다. 전매서 건물은 맞은편 읍장 관사 옆에 있었는데 지금은 길과 주차장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울산에는 담배가 많이 재배되어 연초를 학성공원 앞 농협창고에 보관했다. 그리고 신탄진으로 가져가 담배를 만든 후 다시 가져와 전매서 창고에 보관했다. 울산 전매서가 현 울산시청 앞 외환은행 인근으로 옮긴 것은 울산이 시로 승격되면서다.

동구 남목에서 1907년 태어나 일제강점기 울산초등학교를 거쳐 대구고보를 졸업했던 승우씨는 총독부 전매국에서 근무한 후 해방이 될 때는 대구 전매서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남목에서 일찍 나왔지만 그의 형 균우는 남목에서 오랫동안 마을 이장을 지내면서 지역 발전을 위해 헌신했는데 6·25때 보도연맹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정직을 토대로 책임감이 강했던 승우씨는 업무처리를 잘해 해방과 함께 부산 전매서를 접수했다. 이 때 그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왜냐하면 당시만 해도 엄청난 양의 담배와 소금, 인삼이 모두 국가귀속 재산이 되어 이를 잘 지켜야 했는데 치안이 좋지 않아 분실방지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씨는 부산에서 일 년 간 일하면서 이들 재산을 지키느라고 많은 고생을 했다.

부산에 근무하는 동안에는 부인이 일찍 돌아가는 바람에 또 한 번 시련을 겪어야 했다. 부인 설애기(薛愛奇) 여사는 설령(薛聆)의 딸로 울산에서 8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설두하(薛斗廈)씨의 누나다.

부산에서 김천 전매서장으로 갔던 그는 6·25가 일어날 무렵 울산전매서장으로 왔다. 이 때 그는 거창 신씨와 재혼한 상태였다. 그는 울산에 있으면서도 그동안 일본인 위주로 운영되었던 전매서 조직을 한국인 위주로 전환시키는데 기여했다. 축구, 배구, 정구, 농구를 좋아해 만능 스포츠맨으로 청빈하게 살았던 그는 자식들이 많은데 비해 수입이 적어 경제적으로 늘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울산 관사는 집 둘레를 탱자나무가 감싸고 있었고 마당에는 텃밭이 있어 배추와 무를 심어 자급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자녀들을 잘 키웠으나 두 자녀가 먼저 돌아가는 바람에 이씨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장남 상노씨는 울산농고 졸업 후 서울상대를 다니다가 4학년 때 갑자기 뇌출혈로 돌아갔다. 둘째 상호씨 역시 울산농고를 졸업하고 서울 문리대 정치과에 합격했으나 어려운 가정형편을 생각해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셋째는 어릴 때 타계했고, 넷째 상백씨는 제일중과 부산고를 졸업한 후 중앙대 법대를 거쳐 지금도 무역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울산을 떠났던 이 서장은 이후 남해 전매서장을 거쳐 삼천포 전매서장 직을 끝으로 공직을 떠났다. 장남 상노씨가 뇌출혈로 쓰러진 곳이 남해였다. 동생 상백씨는 “지금 같으면 형님이 빨리 병원으로 옮겨져 목숨은 건졌을 것인데 당시만 해도 남해 병원들이 의료시설이 좋지 않아 형이 돌아갔다”면서 아쉬워하고 있다. 이승우씨는 이후 부산에서 오랫동안 살다가 말년에는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했던 둘째가 초급장교로 있었던 진해 도만동에서 살았다. 1966년 이곳에서 눈을 감았다.

아쉬운 것은 이처럼 울산 역사가 스며 있는 울산의 마지막 일본식 건물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구청은 이 건물을 복원해 전시실로 이용할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건물이 이처럼 급속히 헐리고 다른 건물이 들어서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