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운동 전반에 참여
1987년 대선 민중후보 출마
이후 통일운동에 헌신해와

▲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5일 투병 끝에 별세했다. 15일 오후 빈소가 마련된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고인의 영정이 놓여있다. 연합뉴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5일 투병 끝에 별세했다. 향년 89세.

서울대병원 등에 따르면 백 소장은 이날 오전 입원 중 영면했다. 그는 지난해 1월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생활을 해왔다. 1933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태어난 그는 1950년대부터 농민·빈 민·통일·민주화운동에 매진하며 한국 사회운동 전반에 참여했다.

국민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였지만 분단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비극을 겪으며 독학으로 통일 문제와 사회 모순에 대한 인식을 키워나갔다. 전쟁 중 부산제5육군병원에서 군 복무를 한 뒤 해외 유학을 권유받았으나 ‘싸우는 조국을 두고 나 혼자만 유학을 갈 수 없다’며 거절했다.

문맹 퇴치를 위한 야학에 참여하던 중 1960년 4·19혁명에 뛰어들었고, 이후 1964년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함석헌·계훈제·변영태 등 재야 운동가들과 함께 참가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재야 정치인인 고(故) 장준하 선생(1915~1975)과는 백범사상연구소 설립과 민족학교 운동도 전개했다.

투옥과 고문은 끊이지 않았다. 1974년에는 유신 반대를 위한 1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됐고, 1979년 ‘YMCA 위장결혼 사건’과 1986년 ‘부천 권인숙양 성고문 폭로 대회’를 주도한 혐의로도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1987년 대선에서는 독자 민중후보로 출마했다가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고, 1992년 대선에도 독자 후보로 출마했다. 이후에는 자신이 설립한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해왔다. 노령이 된 최근까지도 현실 참여는 멈추지 않았다. ‘장산곶매 이야기’ 등 소설과 수필집을 낸 문필가이자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 원작자이기도 하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2009), ‘두 어른’(2017) 등 평론·수필집을 비롯한 다수의 저작이 남겨졌다.

그는 일생 동안 당한 모진 고문의 후유증과도 평생을 싸웠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정숙씨와 딸 백원담·백미담·백현담, 아들 백일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차려졌다. 발인은 19일 오전 7시, 장지는 모란공원이다. 장례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등 5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주축이 된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으로 엄수된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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