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서울 문래창작촌

서울 도심 한복판 쇠를 갈고 이어 붙이는 금속 마찰음과 용접 불꽃이 가득한 영등포구 문래동이 있다. 2000년대 들어 산업구조가 바뀌면서 크고 작은 공업사와 공장들이 즐비했던 문래동에 빈 공간이 하나둘 생겨났고, 홍대와 대학로의 젠트리피케이션에서 벗어나 새로운 터전을 찾아 나선 예술가들이 둥지를 틀며 기술과 예술이 어우러진 ‘문래창작촌’이 탄생했다.

◇작업실과 전시·공연장 공존하는 공간

한때 ‘도면만 갖고 문래동에 가면 탱크도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문래동에는 다양한 금속가공 업체가 자리하고 있었다. 많은 공장들이 문을 닫거나 을지로 등으로 이전했지만, 지금까지 수십년 넘게 자리를 지키는 곳도 적지 않다. 이렇게 공장들이 있던 자리에 또는 공장 건물의 위층에 작가들이 작업실을 꾸려면서 탄생한 문래동의 예술 작업실 마을은 2003년 무렵부터 자생적으로 생겨났다.

문래동에는 회화, 설치, 조각, 디자인, 사진 등 시각예술 장르를 비롯해 춤·음악 등 공연예술가 등 250~300명의 작가들이 따로 또 같이 작업실을 구해 활동하고 있다. 작가들이 모여들면서 철공소가 밀집한 문래동 3가를 중심으로 대안예술공간이포, space xx, 아트필드갤러리, 갤러리 LOFT, 시연갤러리 등 전시장과 공연장도 속속 들어섰다. 유리공방 ‘메종드베르’와 ‘아주르하우스’, 도자기공방 ‘초록짙은’ 등 공방도 둥지를 틀었다. 최근 수년 사이에는 예술을 매개로 젊은이들이 모여들면서 카페와 이색적인 음식점, 술집도 문래동을 채웠다.

매년 10월에는 문래동에 둥지를 튼 작가들과 예술공간이 어우러지는 ‘영등포 네트워크 예술제’가 열린다. 올해도 지난 10월20일부터 11월8일까지 예술축제 ‘문래창작촌 예술제’와 전시회 ‘영등포 아트페스타’로 나눠 전시와 공연, 아트마켓 등이 진행됐다.

15년 전 문래동에 둥지를 틀었다는 민화작가 이시연씨는 “초창기 문래동은 형편이 어려운 예술가들이 저렴한 비용으로 작업실을 쓸 수 있게 해 준 공간이었다”면서 “예술가들은 모여있어야 찾는 이들에게도 볼거리를 주고, 작업도 함께 시너지가 난다”고 말했다.

갤러리 LOFT
갤러리 LOFT
시연갤러리
시연갤러리

◇예술과 기술 공존 위한 ‘술술센터’

예술은 어떤 면에서는 기술과 맥락을 같이 한다. 깎고 이어 붙이는 작업을 도면을 기반으로 완성하면 ‘기술’이 창의성에 무게를 두면 ‘예술’이 된다.

작가 작업실과 실험적인 전시공간, 공장지대가 공존하는 문래동의 특성을 살려 지난 2021년에는 ‘예술과 기술의 융합’을 위해 ‘술술센터’가 문을 열었다. 상가와 원룸이 있던 오래된 건물을 리모델링해 탄생한 술술센터는 문래동을 문화로 재생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1층은 커뮤니티스페이스로 문래창작촌의 예술가와 주변 공업사의 기술인이 함께 만나고 교류하는 공간이다. 술술센터에서는 소정의 비용으로 저렴하게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도 운영하고 있어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2층과 3층에는 예술인과 기술인 등 술술센터를 찾는 모든 이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업무·회의 공간인 오픈라운지와·라운지랩, 회의실과 공유식탁을 겸한 예술기술랩이 있다. 4층 술술홀은 다양한 세미나와 강연, 워크숍 등이 열리고 연중 무료로 운영된다.

지하 1층에는 예술과 기술의 협력 결과물을 전시하고 문래창작촌 기반 활동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술술갤러리’가 있다. 개관 이후 예술과 기술의 협업 결과물을 선보이는 전시를 꾸준히 이어왔고, 술술갤러리에서는 오는 12일까지 소공인특별전 ‘Piece for YOU’가 열리고 있다.

아트필드갤러리
아트필드갤러리
대안예술공간이포
대안예술공간이포
▲ 문래예술창작촌은 공업사가 떠난 자리나 공장 위층에 작가 작업실과 전시공간 등이 자리해 철공소와 창작공간이라는 서로 다른 두 분야가 어우러지는 새로운 도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갤러리 LOFT, 시연갤러리, 아트필드갤러리, 대안예술공간이포, 문래창작촌 갤러리 골목 초입의 모습.
▲ 문래예술창작촌은 공업사가 떠난 자리나 공장 위층에 작가 작업실과 전시공간 등이 자리해 철공소와 창작공간이라는 서로 다른 두 분야가 어우러지는 새로운 도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갤러리 LOFT, 시연갤러리, 아트필드갤러리, 대안예술공간이포, 문래창작촌 갤러리 골목 초입의 모습.

◇팬데믹과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내몰려

최근 10여년간 ‘예술촌’으로 주목받던 문래창작촌도 팬데믹과 젠트리피케이션의 그림자를 피하지 못하면서 문을 닫는 문화공간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창작촌 조성 초기부터 운영돼 오던 ‘스페이스 9’과 ‘예술공간 세미’가 최근 폐업을 했고, 임대료가 오른 문래동을 떠나 작업실을 옮기는 작가들도 생겨나고 있다.

서울문화재단이 2010년 문래동에 문래예술공장을 세우고 다양한 문화·예술사업을 했고, 2018년 영등포문화재단이 출범하면서 예술생태계 구축을 위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 이처럼 문화를 통한 지역 재생을 위해 공적 지원을 이어오고 있지만, 거대한 자본의 물리력에 밀리면서 자생력을 잃어가고 있다.

영등포문화재단과 ‘영등포활주로’가 지난해 진행한 ‘문래동 창작환경 실태조사’에 따르면 조사에 응한 예술인의 70.7%가 문래동을 떠나는 예술인을 본 적 있다고 답했고, 절반인 49.2%는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든다고 했다.

문래동에서 15년 넘게 대안예술공간이포를 운영해 오고 있는 박지원씨는 “그동안 마을과 이웃에 대한 성격과 개념이 많이 바뀌었고, 문래창작촌도 여러 변곡점을 거쳐왔다”면서 “예술가들이 모인 창작촌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예술가들이 지역성을 바탕으로 주체적인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과감하면서도 조건 없는 지원이 필요하다. 자본과 정책, 예술가들의 활동이 삼위일체가 돼야 창작촌이 활성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서정혜기자 sjh3783@ksilbo.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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